북엔드

카테고리
마음 공부
낙서
작성일
Mar 4, 2023 11:59 AM
북엔드의 용도를 알기 전에 , 나는 이게 책꽂이가 부서져 고장난 것인 줄 알았다.북엔드의 용도를 알기 전에 , 나는 이게 책꽂이가 부서져 고장난 것인 줄 알았다.
북엔드의 용도를 알기 전에 , 나는 이게 책꽂이가 부서져 고장난 것인 줄 알았다.

무거운 쇠붙이

국민학교 때—누차 말하지만 나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에 다녔다— 교실 정리를 하다가 창틀에 올려진 쇠붙이를 발견했다. 한 쪽은 니은(ㄴ)자로 생겼고, 반대편은 그와 좌우 대칭으로 생겼다. 꽤 무거운 쇠붙이는 마치 책꽂이의 맨 왼쪽 벽과 맨 오른쪽 벽처럼 생겼는데, 어…? 몸통이 없다. 나는 이 물건이 책꽂이가 부숴져 생긴 조각이라고 생각했고 그대로 쓰레기 통에 버렸다.
함께 청소하시던 선생님께서 화들짝 놀라시며, 이건 버리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책꽂이가 부서진 게 아니냐는 내 물음에 선생님께서는 이 물건의 이름은 ‘북엔드’(bookend)이며 책을 정리할 때 매우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이라고 하셨다.
북엔드(bookend)는 책을 서 있는 상태로 유지시켜주는 물건이다. 일반적으로 책꽂이의 맨 끝에 놓이며, 책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국어사전에서는 ‘책버티개’라는 순화어가 나오는데 아무래도 ‘북엔드’ 쪽이 좀 더 입에 익는다.

힐러가 좋아

국민학교 1~2학년 때만 하더라도 앞에 나서는 걸 꽤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1학년 때 내 딴에는 떠드는 아이들의 이름을 적겠다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녀석에게 나도 “떠드는 너 이름미 워야?”하고 목청껏 소리지르며 녀석의 이름을 묻곤 했고, 나 또한 반장에 의해 ‘떠드는 아이’로 지목되어 칠판에 이름이 올려지는 수모를 겪었다. 시장에서 분명히 내 뒤에 있던 어른들이 나를 슝슝 지나쳐서 고춧가루를 먼저 사 가는 걸 보고 되도 않는 의협심에 주인 아저씨에게 고래고래 소리치며 어린이라고 무시하느냐며, 왜 내 주문은 받지 않는지 따져 물었다. 그게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철 없는 행동이라 벽에 쥐구멍이라도 뚫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들 말고도 지금 떠울리면 이불을 걷어 차고 싶은 사건들을 꽤나 많이 저질렀으리라.
 
WoW 클래식의 힐러인 신성 사제. 나는 힐러가 좋았다.WoW 클래식의 힐러인 신성 사제. 나는 힐러가 좋았다.
WoW 클래식의 힐러인 신성 사제. 나는 힐러가 좋았다.
그렇게 탱탱하던 나의 자의식은 좌충우돌하며 깨지고 다듬어져서 어느새 뭉글뭉글하게 바꾸었나보다. 고3때 처음 접한 MMORPG인[1] ‘시간 여행자’에서도, 그 뒤를 잇는 ‘퇴마록’에서도 나는 ‘힐러’를 직업으로 선택했다.
맨 앞에 나서서 적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며 멋있게 적을 베는 전사나 화려한 원거리와 범위 기술을 시전하는 마법사보다 사제가 훨씬 멋있었다. 전사나 마법사의 방어 능력을 올려주고 체력을 회복시키는 직업인 사제 계통의 힐러는 내 플레이 스타일과도 정말 잘 맞았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신부님이 되는 것을 동경해온 때문이었을까?
물론 힐러는 경험치 올리는 게 정말 힘들었다. 대부분의 RPG 게임에서 힐러는 사제 계통이고, 사제들은 날붙이를 소유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살생이 엄격하게 금지된 설정도 있었다. 결국 항상 다른 사람들을 일심히 치료하고 지원하는 가운데 경험치를 올려야 했다. 물론 어느 정도 고위 레벨이 되면 일반적인 무기나 마법으로는 도저히 처지할 수 없는 언데드들을 신성력으로 싸그리 전멸, 아, 아니 그들에게 평화의 안식을 선사하는 쾌감을 얻을 수 있지만 거기까지 도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도 나는 힐러가 좋았다.
게임에 따라 다르지만 직접 상대를 공격하는 딜러, 공격을 받아내고 방어하는 탱커보다 파티원들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힐러의 비율이 적은 편이다. 레벨이 높은 힐러는 훨씬 귀해서 매우 인기가 좋다. 내 자의식이 아무리 둥글둥글하다고 해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있는 건 또 참기 힘들어서 이런 희소성이 강한 힐러가 되어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느낌과 함께 인정 욕구를 가득가득 채웠던 시기, 도파민에 흠뻑 쩔어서 여름 방학을 다 날리며 20만원의 전화비와 어머니의 등짝 스매시를 선물로 받은 대학교 1학년의 여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전면에 나섰다가 적에게 바로 죽임을 당하기도 싫었고, 길을 찾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 스스로 내리기도 부담스러웠던 그때. 여차해서 체력이 떨어지면 바로 나 자신을 치료하면 되니까 생각보다 생존 확률도 높았던 힐러.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저 겁쟁이에다 쫄보였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내 모습도 전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듯하다.

그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저 수많은 책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그들의 버팀목이 되고 싶다. 출처: Unsplash저 수많은 책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그들의 버팀목이 되고 싶다. 출처: Unsplash
저 수많은 책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그들의 버팀목이 되고 싶다. 출처: Unsplash
2001년부터 지금까지, 1년 6개월을 제외한 시간 동안 교편을 잡고 있었으니 나는 햇수로만 따지면 20년이 넘는 시간을 학생들과 함께 보낸 셈이다. 이제 달려왔던 거리보다 달려갈 길이 확실히 적은 시점이 되고 보니, 이제는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는 그냥 그들이 쓰러지지 않게 지지해주는 버팀목이 되고 싶다. 겁쟁이이며 쫄보인 나이지만 그래도 교단 앞에 서면 가슴 속에서는 이미 뜨거운 신성력이 활활 뻗쳐 온다.
학교에서 지켜보는 그녀석들은 기특하게도 서로가 서로를 기대며 그렇게 곧잘 서 있다. 그러다가 한 순간 기우뚱하면서 와르르 무너져내리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녀석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곁에서 든든한 북엔드가 되고 싶은 거다. 그들이 힘든 세상을 버텨낼 수 있도록 말이다.
눈이 안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녀석들은 비시각장애인보다 훨씬 힘든 길을 가고 있다. 그들이 이 험한 세상을 잘 살아내려면 비시각장애인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할 텐데, 그러다보면 쓰러지고 싶은 때가 얼마나 많을까? 그때 그녀석들 옆에서 함께 있어주는 북엔드가 되고 싶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 티 조차 안 나지만, 이따금 책장을 청소하다가 책을 정리할 때 차가운 쇳덩이를 만져보며 ‘아, 여기에 이런 게 있었지? 그래서 책들이 안 쓰러졌구나.’하며 북엔드의 존재를 학생들이 깨달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렇게 사회에 나가서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기쁨을 느끼고 또 하나의 ‘북엔드’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내 자의식의 인정 욕구는 풍부하게 채워질 것이다. 그때는 도파민보다는 세로토닌이 더 콸콸 쏟아지겠지?
그럼요, 암요, 역시 힐러가 짱 멋있지!
안드레아은(는) 두 손을 펴고 빛을 발하며 기도를 외웁니다.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는 이여, 이 사람들의 몸의 상처를 어루만지시고 마음의 고통을 깨끗이 씻으시어 생기를 되찾고 일어설 힘을 주시어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파티원 전체의 체력이 +50 올랐다.

[1] MMORPG: 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의 약자로,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역할 수행 게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게임에서는 여러 플레이어가 함께 하나의 가상 세계에서 모험을 즐기며, 다른 플레이어와 상호작용한다.
 
#북엔드 #힐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