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하게 보지 않기

카테고리
드라마/영화
작성일
Nov 18, 2021 12:43 PM
⚠️
이 글에는 <갯마을 차차차>내용누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고의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다

notion imagenotion image
김선호. 선하고 성실하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이미지로 차근차근 커리어를 다져온 그가 자신이 출현하여 대박을 터트린 드라마의 종영 날 한 통의 게시물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의 사생활 논란은 일파만파로 번져갔고 언론과 대중은 그를 질타했다. 한동안 잠수를 타는 듯했던 그는 입장을 정리했고 그렇게 그는 방송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아쉬웠다. 2년 동안 '1박 2일'에서 멤버들을 챙기는 모습, <스타트업>에서 불운한(?) 서브 남주로 분투하던 모습이 참 좋아보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가 출현했던 그 드라마는 어땠을까 궁금하여 지난 달 틈틈이 <갯마을 차차차>를 정주행했다. 그리고 드라마가 종영한 지 한달 무렵, 김선호는 조심스럽게 다시 방송 활동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뻔한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

치열한 서울살이에서 벗어나 시골(?)을 찾은 사람이 그곳 토박이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투닥거리다가 결국에는 결혼에 골인하는 이야기. 지금까지 수십 번도 넘게 비슷한 걸 본 것 같지만 그 뻔한 이야기가 결코 지루하지 않았던 드라마. 바로 <갯마을 차차차>이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는 '맥거핀'(MacGuffin)이란 게 존재한다. 이야기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등장했다가 소리 소문없이 사라져버리는 사람이나 사물, 사건을 의미한다. 관객들은 주된 이야기의 흐름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맥거핀은 자연스럽게 잊혀 간다.
notion imagenotion image
<갯마을 차차차>에는 정말 여러 명이 등장한다. 언제나 그렇듯 이들은 서로 각자의 시간과 공간을 살다가 조금씩 얽히고 섥히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고 주인공의 서사를 풍부하게 만들 '재료', 그러니까 "맥거핀"으로 쓰이다 어느새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갯.차.>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심지어 불쑥 나타났다가 검거된 범죄자 조차도— 그들만의 스토리가 있었다.
주인공 '홍반장'은 애초에 '공진 사람들'과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정말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홍반장의 지금을 있게 만든 사람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곳에 있었고 그곳에서 살았으며, 또 그렇게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그런 공진에 내려온 '혜진'과 그를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던 '지PD'쪽 사람들까지... 이들이 공진이라는 공간에서 빚어내는 이야기는 결코 납작하지 않았다.
이혼했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다시 맺어진 화정-영국 커플, 서로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표현 방법이 서툴렀던 금철-윤정 커플, 딸을 잃은 아픔을 잘 견디며 살아온 공진의 '소문 제조기' 남숙, 90년대의 명가수이지만 지금은 카페 사정으로 딸을 키우고 있는 춘재를 비롯하여, 언제나 죽이 잘 맞는 공진의 어르신 감리씨와 두 분의 할머니들, 그리고 보고 있으면 흐믓해지는 이준과 보라 어린이...
실은 위의 문단을 써내려가다가 그만두었다. 그저 몇 조각의 단어로 표현하기에 드라마에 비친 그들의 삶은 납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코 맥커핀이 아닌 그들든 주인공인 '홍두식'과 '윤혜진' 못지 않게 굉장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며 이것이 <갯.차.>가 다른 뻔하디 뻔한 멜로 이야기와 다른 점일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남주인공과 여주인공 사이의 밀당, 그리고 연적들의 시기와 복수 같은 게 없어서 밋밋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두터운 이야기가 있어서 정말 좋았다. 드라마의 모티브가 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 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영화의 압축된 세계에 풍덩 뛰어들게 한 <갯마을 차차차>는 그래서 뻔해도 재밌다.
 

느슨하지만 견고하게

notion imagenotion image
 
우리는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게 많다. 볼 것도 많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이걸 다 하려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것을 압축하려 한다. 거기다가 지치고 힘든 일상에 활력을 주기 위해 강한 자극제도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납작한 단편을 보고 그를 판단하고 평가한다. 이미지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라면 응당 받아야 할 죗값이라며 그렇게 우리는 여러 사람을 비난한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드러나는 부분만 보고 그 사람을 쉽게 재단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우리가 입에 올릴 만큼 그리 납작하지 않다.
한달 전만 하더라도 죽일 듯이 들끓던 김선호에 대한 비호감 여론, 지금 그를 싸잡아 비난하던 그들은 다 어디에 있나? 과연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그리 평가할 만큼 두텁게 그를 알고 있었나? 배우 김선호가 하고 싶은 말은 아마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남의 인생을 함부로 떠들어 놓고, 본인이 평가 받는 건 불쾌해? 이봐요, 의사 선생님, 뭘 잘 모르시나본데, 인생이라는 거, 그렇게 공평하지가 않아. 평생이 울퉁불퉁 비포장 도로인 사람도 있고, 죽어라 달렸는데 그 끝이 낭떠러지인 사람도 있어." - 갯마을 차차차 ep2, 홍반장 -
배우 김선호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바로 드라마에서 그가 했던 이 대사이다.
"그러면 어때? 그냥 그런데로 널 놔둬. 소나기 없는 인생이 어딨겠어? 이럴 때는 어차피 우산을 써도 젖어. 이럴 땐 '에이, 모르겠다' 하고 그냥 확 맞아버리는 거야!" - 갯마을 차차차 ep5. 홍반장 -
그리고 지금 그는 열심히 소나기를 맞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잘 견뎌내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저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홍두식이었지만 지금은 "어느 샌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 없이 나타나타는" 홍반장이 된 것 처럼. 나도 그냥 그를 품어주는 공진 사람이 되고 싶다. 나 또한 오점 하나 없는 깨끗한 생을 살아냈다고 단언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갯마을 차차차>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저 '사람 냄새나는 훈훈한 드라마'로 보기에 그것 또한 '납작한 시선'인 거다.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할 때, '납작하게 보지 않기'란 생각보다 참 어렵다는 걸 깨닫는다. 그게 사람에 대한 이어거이건, 사회 현상에 대한 것이건, 자꾸 되돌아보고 점검해보는 수 밖에 방법이 없는 듯하다. 납작하게 보지 않는 연습을 얼마나 더 많이 해야할 지 잘 모르겠다. 그저 느슨하지만 견고하게 이어진 공진 사람들처럼 나도 내 주위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잊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 본다.
 
📰
'갯마을 차차차'의 '사람 냄새'가 감추는 여성대상 범죄의 현실
이진송 님이 쓰신 위의 글은 <갯마을 차차차>가 가진 서사의 문제점을 굉장히 잘 짚어낸다. '혜진'의 입장에서 분명 공진 사람들의 행동은 불편했을 것이며 심지어 스토킹에 가까운 범죄라 일갈한 글은 그저 '훈훈함'을 내세워 다른 사람의 개인사를 물어대고 판단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토대가 된 <어디선가...홍반장> 영화에는 심지어 '여성 피해자'에 대한 묘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2차 가해'가 아닌가 싶을 만한 묘사도 있다. 17년 전에 제작된 작품임을 감안해 보더라도 분명히 지금의 '감수성'에 배춰본다면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다.
<갯.차.>는 여러 모로 "납작하게 보지 않기" 연습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 드라마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