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의 바다

카테고리
낙서
마음 공부
작성일
Jun 9, 2023 10:57 AM
수십개의 향수병. 출처: Unsplash수십개의 향수병. 출처: Unsplash
수십개의 향수병. 출처: Unsplash
 
6월 4일, 코로나19 확진 받은 지 24시간도 안 되는 그날 아침, 치약을 묻힌 칫솔을 입에 넣었다. 치약 냄새가... 사라졌다. 분명히 코가 막힌 건 아닌데도 아무 냄새도 느낄 수 없었다. 세수할 때도 비누 냄새가 사라졌다. 거품을 한가득 내어 코에 가져갔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소고기뭇국을 끓으신다는데 역시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나에게도 코로나와 함께 그가 찾아왔다. '후각상실'.
맑은 콧물이 계속 나왔고 머리는 계속 띵했다. 가래도 잔기침도 멋지 않았다. 다행이 열이 떨어졌지만 전신 권태감은 여전했다. 천운으로 연휴 동안 코로나19를 앓게 되었지만 음식의 맛은 정말 납작했고 단순했다. 짜고, 달고, 썼다. 그게 다였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양치를 쳤다. 얼굴을 닦고 스킨을 듬뿍 덜어 얼굴을 적셨다. 스킨의 촉촉함이 아직 가시지 않은 양 손바닥을 코에 대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화한 느낌이 분명히 콧구멍을 통과하는 대도 아무런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선생님은 한 달 정도, 또 다른 선생님은 6개월 정도 후각 이상을 겪으셨다고 했다. 예전에 감기에 걸렸을 때 이틀 정도 냄새를 못 느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제발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고 향기가 다시 돌아오기를 빌며 다시금 손바닥에 남아 있는 스킨 냄새를 깊이 들이켰다.
그날 아침 뭘 먹었더라? 된장국이었나? 콩나물국이었나? 아니, 콩나물을 넣은 된장국이었나? 평소 생활할 때는 향기의 부재를 잊고 지내다가도 음식을 먹을 때만큼은 슬플 정도로 향기의 빈자리가 커서 헛헛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과도 사각거리는 설탕 덩어리였고 블루베리는 그냥 물컹거렸으며 딸기맛 요거트에서 딸기맛은 완전히 삭제되었다. 맥콜은... 그냥 초정리 탄산수였다.
더 우울해지기 전에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잠도 많이 잤다. 약기운 탓인지 잠은 잘 왔고 시간도 잘 흘렀다. 그렇게 현충일까지 푹 쉬면서 내 몸이 회복되기를, 향기가 다시 돌아와주기를 기다렸다.
6월 7일, 여전히 향기의 부재 속에 출근길에 올랐다. 밥도 따로 먹었다. 수업은 진행했지만 학생들과 1미터 이상 거리를 두었다. 학생들 곁에 붙어서 조곤조곤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녀석들에게 향기의 부재를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체력이 많이 부치기는 했지만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응원으로 이틀을 버텨냈다.
6월 9일 아침, 출근하려고 뿌린 향수가 희미하게나마 느껴진다. 향기가 조금씩, 천천히, 미세하게 돌아오기 시작한다. 분명 일어나서 양치하고 세수할 때만 하더라도, 아침을 먹을 때만 하더라도 향기가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 사이 조금씩 향기가 돌아오고 있다.
출근하니 감사하게도 선생님 한 분께서 따뜻한 민트차를 주신다. 본인도 코로나19 때문에 후각을 잃었다면서, 처음엔 많이 우울했다며 격려해주신다.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를 공부해서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셨는데 본인은 다시는 커피의 미세한 향을 맡지 못할 줄 알았단다. 하지만 결국은 향기가 돌아올 테니 너무 조바심 내지 말라고 하셨다. 그 분 말씀과 염원의 덕분인지, 그분이 건네신 민트차를 들이켜자 특유의 화한 느낌과 함께 옅은 민트향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래, 분명 점점 향기들은 다시 돌아오고 있다.
외따로 떨어져서 먹는 밥이지만 이제는 음식이 조금씩 맛있어진다. 소고기낙지국의 깊은 맛, 연두부 위에 올라간 오리엔탈 소스의 짭조롬한 냄새, 사각거리며 입안에서 씹히는 열무김치의 향기, 콩나물무침의 조금은 매운 풋내, 짜요짜요의 달큰한 냄새! 그래, 그렇게 나는 점점 향기의 바다에 빠져든다. 식후 마시던 쓰기만 한 커피도 이제는 알싸한 원두의 향까지 느껴지고, 컴퓨터실 특유의 먼지 냄새도 조금씩 맡을 수 있다. 이제는 화장실의 좋지 않은 냄새들도 존재감을 슬슬 드러낸다. 그마저도 나는 좋다.
퇴근하고 샤워기에 물을 튼다. 욕실 특유의 냄새들이 주위를 애워 싼다. 샴푸, 린스, 바디워시, 비누... 다체로운 향기가 돌아온다. 빨래를 돌린다. 진한 세제 냄새가 훅 들어온다. 스킨을 듬뿍 손에 덜어 얼굴을 문지르자 화한 느낌과 함께 기분 좋은 익숙한 민트향이 퍼진다. 깊이 그 향기를 들이켜며 '감사합니다'를 연발한다. 잘 익은 김치의 상큼함과 라면의 메콤한 향이 환상적인 향기로 합쳐져 콧속 깊이 소용돌이친다. 오랜만에 뇌에 도파민의 강이 흘러넘친다. 행복하다.
그랬다. 향기가 없는 일상은 조금은, 아니 실은 많이 답답하고 심심했다. 마치 스테레오로 듣언 음악을 모노로 듣는 느낌이랄까? 흑백 텔레티전으로 방송을 보는 느낌이려나? 그만큼 향기는 내 주위를 다체롭게 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 작은 향기들이 결코 작지 않음을 다시금 느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없다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 그 무엇이라도 언제든지 잃을 수 있음을 깊이 깨달았다.
아직 향기가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닌 듯하다. 몸 상태도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그 특유의 나른함과 띵한 머리는 쉬이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다. 향기가 이렇게 돌아와 준 것처럼 몸상태도 그렇게 돌아와 줄 것이다.
언젠가 느껴지는 모든 향기들이 다시 그저 그런 향기들로 내 주위를 채울 때면 오늘의 기억을 꺼내봐야지.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향기 하나하나에 감동했던 그때를 떠올려야지. 그러면 적어도 감사를 모르고 살아가게 되는 치명적인 실수는 저지르지 않겠지. 아마도 그렇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