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중쇄를 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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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중쇄를 찍자!>의 원작은 만화입니다. 그래서인지 1화는 일본 드라마 특유의 과장된 연기와 익살스러움으로 가득합니다. 전개가 조금 억지스럽기도 했구요. 하지만 2화부터는 드라마 <미생>을 떠올리게 합니다. 큰 차이점이 있다면 <미생>은 ‘장그래’의 성장에 맞춰 ‘바깥세상’을 냉소적으로 그린다면, <중쇄를 찍자!>는 주인공인 ‘코코로’의 시선에서 주변인들의 ‘내면’을 따뜻하게 바라봅니다. 장그래는 계약직이고, 쿠로사와는 정규직인 것도 다르네요
저는 <중쇄를 찍자!>가 특정 인물을 일방적으로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매화마다 각자의 사정을 균형있게 보여주고자 애쓴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입체적인 인물 묘사 때문인지, 판타지 같았던 드라마가 현실적으로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함께 드라마를 정주행한 친구도, 매 화마다 묘하게 위로를 얻었다 하더라구요.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인물은 2명입니다. 먼저, ‘신인 잡는 편집자’라 불릴 정도로 회사의 이익과 효율만을 따지는 노보루. 한 때 누구보다 만화에 진심이었고 열정적이었던 그가 냉정한 인물로 변한 배경은, 냉혹한 현실 앞에 냉소하는 우리네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화에서 드라마는 ‘편집자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데, 저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았습니다.
‘일이란 무엇인가?’
노보루는 회사에 안정적인 수익을 안겨줌으로써, 동료 편집자들이 새로운 작품기획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줍니다. 하지만 만화가를 회사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만 대하다 보니 따뜻한 조언과 어깨를 기댈 곳이 더욱더 필요한 신인들에게 큰 좌절을 안깁니다. 편집장과 부편집장은 그의 선택을 이해하기에, 또 그가 있어 다른 동료들에게 다양한 기회가 열리고 있음을 알기에 그를 마냥 나무라진 못합니다. 오히려 고맙다고 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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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니는 직장에 예산을 많이 따오는 분이 계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그의 직업 윤리와 일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제가 당연하게 누리던 혜택 중 상당수가 그가 따온 예산이 있어 가능했던 일임을 얼마전 알게 되었습니다. 직장이란 풀(pool)에서 제가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던 건, 누군가 물을 열심히 채워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같은 결과를 만들고 싶을 때, 다른 방식으로 해내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를 닮고 싶진 않지만, 그의 생각과 결정은 무시하지 않으려 합니다. 무슨 일이든 명암이 있는 법이고, 저도 비슷한 결정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조금은 부끄러운 선택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다만, 나를 합리화 하기 위해 그를 인정하는게 아니라 더 나은 방식으로 더 좋은 결과를 만들고 싶기에 그의 사례를 참고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일’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더 나은 과정으로 더 나은 무엇을 만드는 일’
여러분에게 ‘일’은 무엇인가요?

기억에 남는 인물 두 번째는 만년 어시스트 ‘누마타 와타루’ 입니다. 스무살에 신인상까지 받은 유망주였지만, 마흔이 다 되어도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지 못합니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만화에 대한 지식과 열정도 풍부하지만 딱 하나가 부족합니다. 재능.
와타루는 후배의 데뷔를 볼 때마다 마음이 쓰리지만, 참고 견디며 오래된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인정 받을 수 있을거야’ ‘언젠가는 내 만화를 알아보는 좋은 편집자를 만날 거야’ 되내이며 만화 출판에 계속 도전합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신입작가 하쿠를 만난 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되고 결국 만화에 대한 꿈을 접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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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부족한 재능을 인정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요. 저는 스스로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보통의 존재임을 받아들이기 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저는 좀 더 특별해질 수 있었습니다. 특별함은 노력한다고 해서, 가진게 많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게 아니더라구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존귀함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누마타는 고향으로 돌아가 사케를 판매하는 가업을 잇기로 마음 먹습니다. 만화가를 목표하는 동안은 특별하게 있을 수 있었기에,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꿈을 놓지 못한 그가 진짜 자신과 마주하는 장면은 데미안의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새에게 알은 세계다’
‘초판발행’을 꿈꾸다 ‘신주출래’를 향해 떠난 그의 시작을 응원하며 와타루의 이야기가 나오는 7화는 앞의 내용을 몰라도 충분히 볼 수 있으니, ‘버티는 것 자체가 재능’이란 말이 씁쓸하게 와닿을 때면 꼭한 번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