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되어주기

카테고리
교육
작성일
Mar 26, 2021 10:3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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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임 때 나는 학생들에게 '의자'가 되어주고 싶었다.
 
힘들면 와서 쉬어가고
할 얘기 있으면 들어주고
친구 여럿이 앉아서 노닥거리고
아니면 그냥 우두커니 앉았다 가기도 하는
그런 의자.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니
어찌어찌 의자가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의자에는 뭐가 그리도 많이도 쌓여 있는지
학생들이 앉을 빈 자리가 없다.
아직 3월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가정통신문은 스무게가 훨씬 넘고, 제출한 서류도 100페이지가 넘는다. 교육부에서 다 학생들을 위해서 제공해준 매뉴얼이니까, 학생들의 안전과 건강과 올바른 윤리 의식을 위해서 제공해준 소중한 교육 자료이니까, 그러니까 열심히 학생들에게 전달해주고 들려주고 가르쳐주어야지. 그것이 교사의 본분을 다하는 길이니까.
다, 학생들을 위한 것이니까.
 
자기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는 학생이 있다.
한 번 이야기를 꺼내면 5분도 좋고 10분도 좋다.
근데 나는 그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줄 수가 없다.
보충 수업도 받아야 하고, 체조도 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방과후 수업도 들어야 하고, 야자도 해야 하고, 봉사 활동도 해야 하고, 인강도 들어야 하고, 입시 준비도 해야 한다. 자신들의 성장과 발전과 올바른 인생관 형성, 무엇보다 그들의 소중한 미래를 위해서 짜여진 계획니까, 그러니까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계획대로 움직여야지. 그것이 학생의 본분을 다하는 길이니까.
다, 너희들을 위한 것이니까.
 
나에게는 학생들이 앉을 빈 자리가 없고
학생들에게는 의자에 앉을 빈 시간이 없다.
그게 참,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