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아침, 이름 야구

카테고리
말과 글
작성일
Apr 28, 2021 01:3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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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삼 넷 오 여섯 칠 팔 아홉 공"
언젠가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군인들이 숫자를 세는 걸 봤을 때 굉장히 신기했다. 소음이 많은 상황에서 정확하게 숫자를 전달하기 위해 비슷한 발음을 걸러내고 최대한 구별하기 좋게 붙인 숫자, 이름하여 '포병 숫자'다.
이렇게 말하고 듣는 사람이 실수하여 정보가 잘못 전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음성에 독특한 기호를 붙인 것을 '음성 기호'라고 한다. 알파, 베타, 찰리, 델타... 하는 식으로 이미 로마자 알파벳에는 오래전부터 음성 기호가 붙여져 있으며 널리 사용되고 있다.
우리말에도 음성 기호가 붙어 있다. 중앙전파관리소에서 고시한 국가 표준 음성 기호인데 다음과 같다.
기러기, 나포리, 도라지, 로오마, 미나리, 바가지, 서울, 잉어, 지개, 치마, 키다리, 통신, 파고다, 한강
아버지, 야자수, 어머니, 연꽃, 오징어, 요지경, 우편, 유달산, 은방울, 이순신, 앵무새, 엑스레이
그러니까 "가리기, 아버지, 잉어, 야자수"는 '가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왠지 입에 잘 붙지 않는다. 세 글자로 된 낱말들도 꽤 있다.
iOS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쓰는 VoiceOver에도 한국어 음성 기호가 있다. 한 글자씩 내용을 확인할 때 'hint' 속성에서 읽어주는 것인데 표준 한국어 음성 기호와는 완전히 다르다.
가을, 나무, 다리, 리본, 마루, 바람, 소리, 이름, 장미, 차례, 커피, 토끼, 파도, 하늘
아침, 야구, 어부, 여름, 오리, 요술, 우물, 유리, 은발, 이름
앵두, 에미, 얘기, 옛날, 왕자, 왜곬, 원수, 웨딩, 의사
이 음성 기호를 사용하면 "가을, 아침, 이름, 야구"는 '가야'가 된다. 두 글자 낱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고유어를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 표준 음성 기호보다 이쪽이 훨씬 입에 잘 붙는다. 아무래도 "키다리, 어머니, 미나리, 파고다, 유달산, 통신, 어머니"보다 "커피, 어부, 마루, 파도, 유리, 토끼, 어부" 쪽이 훨씬 말하기 좋고 듣기 편하다.
요즘은 전화로 이메일 주소나 전화번호를 불러주어야 할 때가 많은데 이럴 때 포병 숫자나 음성 기호를 사용하면 어떨까 싶지만 상대편이 음성 기호를 모르면 이것 또한 쉽지 않다. 어쨌건 우리가 무심코 듣고 말하는 말마디에 이런 예쁜 이름이 불어 있다는 게 신기하다. 아, 그러고보니 가수 아이유가 리메이크한 노래 중에 '가을 아침'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퀴즈 하나. 위에서 썼던 "커피, 어부, 마루, 파도, 유리, 토끼, 어부" 는 무슨 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