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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유하는 것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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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읽다 보면 작가들이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캐릭터와 설정을 처음에 부여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작가가 아닌 캐릭터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느낌을 받는다"
참 멋있는 말이다. 작품에 열중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 자신의 노력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고상한 방법이자, 캐릭터가 서사를 만들고 작품을 완성한다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도 함께 느껴진다. 이런 작품을 쓰는 사람이 부러울 따름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작품을 소화하는 속도가 좀 늦다.
평생 메이저 취향은 아닐 나는, 남들 다 보는 작품을 몇 년 뒤에나 보고 그제야 재밌었다고 말하면서 굳이 핀잔이나 듣는 게 익숙했다. 왜 그럴까 고민하며 스스로 내린 답은 남들보다 작품 속 다른 곳에 더 오래, 더 깊게 빠져 있다는 것이다.
서사속에서 경유하고 지나쳐가는 이야기, 장소, 인물은 특히 나에게 더욱 재미있게 느껴진다. 작가도 주인공이 이끄는 이야기를 따라 간다고 하니 남은 공간은 독자의 몫이다. 그 누구도 미처 신경 쓰지 않는 이야기 바깥 빈 공간에 내 마음대로 낙서를 할 수 있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요점정리해야 효율적인 시대, 동영상 마저도 15초 안에 재미를 몽땅 때려 박아야 흥하는 시대에 잉여로운 공간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게 인간 잉여로서 참 아쉽지만, 경유하는 공간을 주제로 사용하며 나에게 즐거움을 준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자기만의 작품 속 잉여 공간이 있는 1문화 분들의 공간도 소개해주시면 참 좋겠다. 잠시 빌려 쓰고 깨끗하게 돌려드릴 자신이 있다.

tvN - 스페인 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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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나영석PD 하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프로그램이다. 자가복제라는 비판을 받던 와중에 등장한 프로그램이라 흥행성은 부족했지만, 알베르게라는 순례길 중간의 경유하는 공간을 활용한 점에서 즐거웠다. 손님이 없는 날도 그대로 방영하며 나영석 PD 프로그램의 작위적인 느낌을 약간이나마 덜어낸 것도 좋았다.
나의 감상 포인트 알베르게에 들렀던 한국인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먼저 뭘 했을까? 돌아온 한국에서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 다른 알베르게에 묵고 나서야 촬영 소식을 들었다면 아쉬웠을까?

카카오웹툰 - 카페 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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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동네에 자주 들르던 작가에게 뜬금 없이 편지를 쓰고 사라진 카페 주인. 이제 카페 주인은 이 여인이다. 앞으로 카페는 어떻게 될까? 유료결제를 하지 않고 보는 중이라 관심 있다면 같이 보셔야 알 수 있다.
나의 감상 포인트 이 잔잔한 만화의 댓글로 카페의 운영비나 월세를 걱정하는 현실적인 독자들 앞에서 주인공은 잘 버틸 수 있을까? 카페에 하루 손님이 얼마나 와야 일과 병행할 수 있을까?

영화 - 존 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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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가장 멋진 공간은 '호텔 컨티넨탈'이다. 호텔 안에서 킬러들이 지켜야하는 두 가지 규칙이 본격적으로 부딪혔을 때 호텔은 쑥대밭이 된다. 키아누 리브스가 총으로 사람 한 명을 더 쏠 동안, 혼자서 이런 매력적인 공간을 상상할 수 있다는 건 큰 즐거움이다.
나의 감상 포인트 전 세계에 있을 호텔 컨티넨탈 상상하기, 주인공을 싫어하는 호텔 매니저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