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나의 '삼산텍' - 드라마 <스타트업>

카테고리
드라마/영화
추억
작성일
Jan 9, 2021 06:54 AM
드라마 <스타트업>의 남도산, 김용산, 이철산이 창업한 "삼산텍" 사무실. 사진=tvN드라마 <스타트업>의 남도산, 김용산, 이철산이 창업한 "삼산텍" 사무실. 사진=tvN
드라마 <스타트업>의 남도산, 김용산, 이철산이 창업한 "삼산텍" 사무실. 사진=tvN
 
어렴풋이 들려오는 교수님의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뜬다. 부숴질듯 여기저기 찌뿌듯한 몸을 야전침대에서 일으키니 왼쪽에 어제 세팅이 끝난 천 만원짜리 서버가 돌고 있다. 일찌감치 잠에서 깬 동기 녀석과 선배는 벌써 침대를 정리하고 있다. 불과 서너 시간 전, 잠들면서 선배가 한 말이 몽롱한 마릿속에 떠오른다.
"천 만원 짜리 서버랑 함께 잠을 자다니, 꿈만 같다!"
1997년일 거다. "특수교육 재활 공학 센터". 내가 5년 여를 몸담았던 애증의 그곳. 대학 시절 나의 꿈이 자랐던 그곳. 드라마 <스타트업> 속 '삼산텍' 사람들과 그들의 사무실을 보면서 '공학센터 크루'인 '우리의 시간'이 아련하게 떠오른 공간이다.
삼산텍의 그들과는 달리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한 건 아니다. 대학생인 우리는 비영리 연구 기관에서 공부를 목적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기술과 공학으로 더 나은 특수교육과 장애인 재활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는 건 공학센터의 모토이고, 사실 나는 그 때 코딩이 너무너무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학센터 창립을 주도했던 그 선배의 꼬임(?)에 적극적으로 넘어갔다.
처음에는 선배와 나, 그리고 두 명의 동기 녀석으로 시작했다. 선배는 앞으로의 세상에는 특수교육과 장애인 재활도 기술과 공학의 비중이 커질 거라 말했고 우리가 그걸 해보자고 제안했다. 문과인 특수교육과에서 교과 전공으로 전산을 선택하여 한 시간 거리인 대명동 사범대와 경산 공대를 오가며 수업을 듣던 나에게 선배는 정말 열심히 코딩할 수 있는 달콤한 기회를 주겠다고 단언했다.
선배는 지도교수님과 함께 센터를 설립하고 문을 열었다. 극 중 CEO인 서달미가 그랬던 것처럼 인재 영입에도 열심이었다. 콘텐츠의 기획과 내용을 채웠던 언어치료를 전공한 선배, 일러스트와 디자인을 맡았던 특교과 후배 두 명, 음악과 음향효과를 맡았던 작곡 잘하는 후배, 나만큼 개발에 관심을 보였던 재활공학과 후배... 이렇게 많은 인재들이 우리와 함께 했다. 우리는 매일 출근하며 각자의 역량을 키워나갔고, 한데 모여 스터디도 했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사전 작업이었다.
공대생이 아니었던 우리에게 "특수교육 재활 공학 센터"는 '실리콘 벨리'였다. 천 만원이 넘는 서버를 구축하고 초고속 T1 망을 무제한으로 쓸 수 있었던 인터넷 환경, 뜨거운 대프리카에서 시원하게 일할 수 있었던 에어컨 빵빵한 사무실, 88건 마스터 키보드, 와콤의 무선 펜 태블릿, 여러 가지 개발 도구와 멀티미디어 저작 도구들, 홈페이지 제작 도구들을 직접 사용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나는 여기에서 리눅스로 서버도 공부하고,
DelphiDelphi
Delphi
로 개발도 했다. Adobe Flash의 전산인 Macromedia Director를 공부하면서 특수교육과와 재활공학과 학생들에게 공개 강의도 했다.
그래도 그런 꿈 같은 공간이 언제나 좋았던 건 아니었나보다. 교생 실습을 마치고 무거은 몸을 이끌고 공학센터로 퇴근해서 선배한테 툴툴거렸다. 다른 녀석들은 여행도 가고 미팅도 하고 대학 생활의 낭만을 즐기는 데, 이 공간에 틀어박혀서 햇볕도 못보고 거의 매일 야근을 하던 게 서러웠던 나에게 "남들이 우리나라에서 여행할 동안 우리들은 인터넷으로 세계를 누빈다"는 선배의 서툴렀던 위로를 지금 떠올려보면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도 그렇게 나를 다잡아준 선배 덕에 하나둘씩 무언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의 땀과 노력과 잠과 시간을 쏟은 결과물이었다.
첫 산출물인 "대구대학교 50주년 기념 CD 타이틀"을 출시했을 때의 환희, "한국의 특수교육"으로 전국 홈페이지 경연대회에서 기술 기업들과 나란히 겨루어 3등을 차지하고 의기양양 수상하러 상경할 때의 짜릿함, 버그로 점철된 "전산하된 개별화 교육 프로그램(IEP) 작성 도구"의 프로토타입을 시연했을 때 돌아온 날카로운 피드백으로 받은 상처들, 통 언어론에 기반한 유아용 언어 학습 프로그램인 "한글이랑 놀아요"를 출시하고 한 기업과 함께 상업화해서 발매했을 때의 뿌듯함 ... 그 기억의 조각들이 곰팡내 나는 사무실에서 시작한 '삼산텍'이 '청명 컴퍼니'가 될 때까지의 여정을 따라가며 내가 고스란히 느낀 추억이었다. 물론 주위의 응원으로 용기를 내어 함께 영화를 본 후배와 사귀다가 결국 슬프게 헤어졌던 아픈 스토리도 덤으로 떠올랐다는 건 비밀.
20년이 훨씬 넘은 지금, '특수교육재활공학센터'의 멤버들은 각자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하고, 대학교에서 또다른 학문을 연구하며, 연구소나 기관에서 혹은 교육청에서 더 나은 특수교육과 장애인 재활을 위해서 일하는 그들을 다시 만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삼산텍'의 옛 사무실에 새 입주자가 들어오던 날 삼산 크루인 그들이 추억을 곱씹으며 부둥켜 안고 함께 울었던 그 마음이 내 마음에도 큰 공명을 일으켰다. 나도 내 대학 생활을 공학센터에서 불태웠으니까.
극의 전개가 너무 개연성이 없다느니, 주인공보다 서브 주인공이 더 주목을 받는다느니, 스타트업이 일은 안하고 연애만 한다느니,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마법같은 현실을 그리고 있다느니 하며 드라마 <스타트업>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글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시절 내 소중한 기억을 소환해 준 드라마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주인공의 이름이 모두 전철역에서 따왔다는 점, 체크남방에 부스스한 머리처럼 너무나도 뻔한 공대생 스테레오 타입을 쓴다는 점, 시각장애인 이야기와 함께 기술 발전이 장애물이 되는 사람들에 대한 고찰이 있다는 점, 깨알 같은 아재 개그가 난무하고, 예쁜 성당을 배경으로 풋풋한 청춘 커플이 나온다는 점은 <스타트업>에 빼놓을 수 없는 내 취향저격 포인트이다.
 
"함께 있는 순간이 당연해서 귀한 줄 몰랐어. 모든 순간이 선물이었는데. 그래서 난 결심했어, 더 이상 후회로 나의 지금을 채우지 않기로." -드라마 <스타트업>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