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porwave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의 장르라고 하기에는 좀 협애한 정의인 것 같고 하위문화라고 하기에는 좀 오바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렇게 레이블 붙여진 음악과 영상이 제 취향과 잘 맞아서 추천하고자 합니다. 7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후반까지의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음을 카세트테이프 필터로 돌려서 리버브와 콤프레서 이빠이 넣고 과거 TV나 라디오 광고 음성을 샘플링해서 피치를 낮추고 늘어지는 드럼비트를 넣습니다. 그런 음악에 맞춰 세기말에 촬영된 8mm필름이나 광고, 애니메이션 등을 컴파일합니다. 저는 이것을 농반진반 VHS미학이라고 부릅니다. 주요 테마는 사이버펑크, 쇼핑몰 아케이드, 됴쿄의 밤거리, 일본 SF애니메이션입니다.
댓글들을 보시면 재미있습니다. 베이퍼웨이브를 보고 듣는 소비자들은 대부분 우리 또래입니다. 기억하기는 커녕 경험해보지도 못한 세기말 문화의 분위기에 심취해 있고 향수마저 느낍니다.
사이버펑크, 도쿄, 일본 애니메이션은 모두 후기 자본주의 거품을 표상합니다. 특히 80년대부터 미국의 포드주의 체제가 이윤율 하락을 맞이하는 동안 일본이 도요타주의 체제로 급성장하면서 서구 선진국들의 경외의 대상이 됩니다. 이때 나오는 할리우드 SF영화들의 미래 이미지는 일본이 독점합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일본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노동 집약적으로 CG가 전혀 없는 고밀도의 디테일한 수작업 그림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인건비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당시 일본의 거품경제는 그게 가능했나봅니다. 베이퍼웨이브에 옛 영상들과 함께 컴파일된 8-90년대 애니메이션 영상을 보면, 지금은 느끼기 힘든 재질감에 대하여 묘한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연하나마 좋은 시절로 학습했고 기억하고 있는 때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추천해드린 바 있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저자 마크 피셔는 '미래는 취소되었다'라고 선언합니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과거로 눈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