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는 신 앞에 동등하다" 지금, 힐데가르트 폰 빙엔 (2013)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 1098~1179)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 1098~1179)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 1098~1179)
이 글은 지난 2013년 서찬휘가 아내 헤니히 님의 생일 선물로 쓴 것으로, 헤니히 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자 천연 원석 테라피 주얼리 메이커 페르소나스톤(구 와이즈로터스)의 수호 성인인 힐데가르트 폰 빙엔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삶에 관하여

 
힐데가르트는 제1차 십자군 전쟁이 발발했던 1098년 독일 남서부 알제이(Alzey) 지역 근방에 자리한 작은 마을 베르머스하임(Bermersheim)에서 귀족 가문 힐데베르트(Hildebert)의 열째로 태어났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힐데베르트 부부는 딸이 여덟 살 되던 해에 당시 디지보덴베르크(Disibodenberg)에서 은둔하고 있던 유타(Jutta)에게 맡기는데, 여기에는 나면서부터 몸이 약했던 힐데가르트를 오래 살게 하려면 신의 뜻에 따라 수도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에 따랐다는 설과 십일조 개념으로 열 번째 자식을 신에게 바친 것이란 설이 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그 시기 20대 초반의 은둔 여성 수도자였던 유타에게서 가족과 떨어져 사는 공동체 생활은 물론 당시로서는 매우 고급 교육이라 할 수 있었던 라틴어 글 읽기와 쓰기, 성서 시편, 음악 등을 배웠습니다. 유타는 '슈폰하임의 메긴하르트(Meginhard von Sponheim)' 백작의 동생으로 그 스스로가 귀족 출신이었으며, 종교적 지식은 물론이고 다채로운 교양적 소양을 제자들에게 전수했습니다. 힐데가르트가 14~17세 되던 즈음 유타의 여성 신앙 공동체가 디지보덴베르크의 남성 수도원인 베네딕토 수도원의 부속 수녀회로 성장하고 유타가 그 장을 맡았으며, 힐데가르트도 베네딕토 수도원 소속의 정식 수녀가 됩니다.
 
힐데가르트가 비전을 기록 중인 자신을 그린 그림힐데가르트가 비전을 기록 중인 자신을 그린 그림
힐데가르트가 비전을 기록 중인 자신을 그린 그림
이 시기부터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 수녀회의 원장이 되던 마흔 두 살 무렵에 이르기까지 힐데가르트의 행적은 그다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영적 환상을 끊임없이 본다는 힐데가르트가 남성 중심의 극단적 보수 성향이 팽배해 있던 당시 종교 조직 내에서 찍혀나갈 것을 염려한 유타의 가르침에 따라 조용히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136년 12월 유타가 세상을 떠나자 수도회의 수녀들은 만장일치로 당시 38세였던 힐데가르트를 후임 원장으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힐데가르트는 5년 뒤인 1141년, 42세 7개월이 되던 시점에 하늘의 계시를 받습니다. 내용은 네가 지금껏 보아온 환시와 이를 통해 느낀 것을 숨기지 말고 세상을 향해 쓰고 말하라는 것. 힐데가르트는 처음엔 이 계시를 거부하려 들었지만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마음 속 갈등과 정신적 피로로 몸이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치면 마치 무병 같은 걸 테지요? 무엇보다도 여기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당시 사회는 수도회 안이 여성에겐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곳이었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남성 중심적인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안전'이라는 것조차, 수도자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거할 때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수도자가 될 때 지켜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는 신, 그리고 상급자를 향한 절대적 복종(순명)입니다. 힐데가르트는 남성 수도자들이 중심인 베네딕토 수도회의 부속 수녀회 소속이었지요. 그 당시에는 수녀회란 수도원의 부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아무리 수녀 사이의 장이었다고 하나 당시 10명 안팎이 모인 신앙 공동체 수준이었던 수녀회는 남성 수도자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수녀인 힐데가르트가 자신이 본 것을 '숨기지 않고 세상에 내놓겠다'는 결단을 내렸다는 건 그야말로 대단한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그 일이 하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인 이상, 이단으로 몰릴 가능성도 컸지요. 당시 수도원장 대리이자 힐데가르트의 고해 사제 역할을 맡고 있었던 폴마르(Volmar)는 힐데가르트의 고민과 번민에 "계시를 따르라"고 말해주고, 원고를 다듬는 역할까지 맡아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서야 힐데가르트를 괴롭히던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이 시기부터 10년에 걸쳐 첫 책인 『쉬비아스(Scivias)』을 저술합니다. 이 때 저술을 도운 인물이 힐데가르트가 가장 사랑한 제자이자, 훗날 가장 아픈 이름이 되는 리햐르디스(Richardis)입니다.
『쉬비아스』는 3부 스물여섯 꼭지로 이루어진 책으로 집필 기간만큼이나 내용도 깁니다. 텍스트는 1만5천 자, 쪽 수로는 600여 쪽이나 되는 책입니다. 세밀화도 서른다섯 점이나 들어갔습니다. 책에는 신께서 자신에게 내린 환상과 이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계시, 이른바 '비전'을 세상에 알리라 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해 창조와 타락에 관한 주제와 관련한 비전 여섯을 담은 첫째 장, 예수와 교회와 구원과 관련한 비전 일곱을 담은 둘째 장, 그리고 축성과 함께 찾아올 하느님 왕국과 함께 신과 악마 사이의 긴장 상태 증가에 관련한 비전 열셋을 담은 셋째 장이 배치돼 있습니다. 제목인 『쉬비아스』는 '신의 길을 알라'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문구 'Scito vias Domini'에서 따 온 표현입니다. 독일어로는 『길의 조명(Wisse die Wege)』이라 번역돼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신 후 1141년이 되던 해, 내가 마흔두 살 하고도 일곱 달이 더 지났을 때, 번개가 번쩍이면서 불덩이 같은 빛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것은 하나의 불꽃처럼 나의 뇌와 심장 그리고 가슴을 뚫고 흘러갔으나, 기진맥진하게 만들지 않고 태양이 제 빛을 퍼뜨려 한 사물을 따뜻하게 해 주듯 온화하게 불타올랐다"
 
이 책은 쓰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세상에 드러나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아무리 각오를 단단히 했다 하더라도, 극단적 보수성향을 띠고 있던 당시 교계 입장에서는 쉬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들이 있었기에 조심을 해야 했습니다. 『쉬비아스』를 책 형태로 처음 묶어낸 것이 1146년. 힐데가르트는 당시 교계에서 명망 높은 인사였던 끌레르보의 베른하르트(Bernhard von Clairvaux)에게 정중히 자신의 작업물을 평가해줄 것을 청했습니다. 베른하르트는 프랑스 출신 신학자이자 힐데가르트가 『쉬비아스』를 낸 시점에 재위하고 있었던 교황 에우제니오 3세(Eugenius Ⅲ)의 스승이었고, 이론에만 기울기 십상인 스콜라주의 사조와 치열하게 논쟁을 거듭하며 변증법적 스콜라주의가 하느님의 신비를 땅에 떨어뜨리고 기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비록 2차 십자군 원정의 당위를 홍보하라는 교황 및 제후들의 명에 응했다 제대로 수습을 못하고 실패하긴 하였으나 그 시기 가장 영향력이 큰 성직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직접 여러 교황에게 직언을 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고, 대립교황 등으로 말미암아 난장판이었던 당시 교계 분위기를 다잡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자연히 여러 제후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겠지요. 하느님을 향한 완전하고 무한하며 더할 나위 없이 높은 사랑을 강조하여 훗날 교회 박사 칭호(1830)에 이어 '달콤한 꿀 같은 박사'라는 별명을 받았던(1953, 교황 피우스 12세) 베른하르트. 그는 다름 아닌 중세 말엽을 장식한 신비주의의 선구자였습니다.
신비주의란 절대적이자 궁극적인 대상과의 내면적 일치 체험을 추구하고 중시하는 철학 사조 또는 사상입니다. 그러한 사조의 선구자였던 베른하르트에게 하느님이 내린 비전을 기록했으니 검토해 달라는 힐데가르트의 편지가 어떻게 보였을까요. 베른하르트는 힐데가르트에게 하늘의 뜻이라면 자신이 부연할 것이 없으니 받은 은총만큼 사랑과 겸손을 품으라는 취지로 답장을 보냅니다. 교황과 제후들에게도 영향력을 끼치는 큰 성직자 베른하르트의 인정은 곧 교계의 인정이다시피 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집필을 도왔던 폴마르의 보고를 받은 디지보덴베르크의 베네딕토 수도원 원장 쿠노(Cuno)는 마인츠(Mainz) 대주교였던 하인리히(Heinrich)에게 힐데가르트가 보는 비전과 관련한 심사를 요청하였고, 1147년 『쉬비아스』의 초판을 두고 교황 에우제니오 3세와 베른하르트가 배석한 시노드(synod, 가톨릭 교회 내 중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는 자문 회의)가 열립니다. 1차로 출판된 분량을 제출받아 심사하는 자리에서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힐데가르트가 본 비전의 내용을 공식적으로 인정합니다. 이로써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비전을 세상에 펼쳐 보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함은 물론, 교계와 세속 정치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1148년에 들어 힐데가르트는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독립해 수녀들이 스스로 직접 모든 일을 꾸려 나가는 수녀원을 세우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교계 분위기로는 수녀회란 남성 수도원에 부속한 것에 불과했고 수녀란 신부를 상급자로 모시고 복종해야 할 불완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힐데가르트의 발상은 수녀가 남성 수도자들에게서 지위와 경제력 측면에서 완전히 독립함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모로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베네딕토 수도원 원장 쿠노의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자신이 장으로 있는 수도회 부속 수녀회 수녀가 명성을 얻자 이를 빌미로 귀족, 제후들에게 수많은 기부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돈줄이 휑하니 사라질 판이었거든요. 쿠노와 힐데가르트의 싸움은 2년에 걸쳐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다 애제자 리햐르디스의 어머니이자 힐데가르트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슈타데(Stade) 후작 부인과 마인츠의 대주교 하인리히가 중재를 하고서야 가까스로 수습되었습니다. 1150년, 힐데가르트는 수녀들을 이끌고 제2의 고향이다시피 했던 디지보덴베르크를 떠나 루페르츠베르크(Ruppertsberg)에 새로운 수녀원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새 수녀원 건립은 교회 역사상 첫 단독 수녀원으로 기록될 만큼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만, 이 시기에 일부 수녀들이 힐데가르트에게 반발하고 떠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루페르츠베르크는 일찍이 성 루페르트(st.Rupert)가 성전을 건축했던 곳으로 나헤(Nahe) 강과 라인(Rhein) 강이 만나는 목 좋은 곳이었으나 루페르트 사후 380년 가량이 지나 힐데가르트가 도착했을 시점엔 이미 폐허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비전을 통해 목도한 자리였다곤 해도 말이지요. 때문에 수녀들은 조용히 기도만 하던 몸으로 직접 돌을 나르고 물을 긷고 나무를 베는 공사장 인부 노릇을 해야 했는데, 귀족 자제 출신으로 수녀원에 들어왔던 이들에겐 이게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던 겁니다. 물론 이건 수도원장인 쿠노가 독립을 허락은 했으되 재정적인 부분을 전혀 도와주질 않은 탓도 있었지만요. 많이 좀스러운 행태였던 듯합니다만, 어쨌든 일부 수녀들은 힐데가르트에게 "그냥 있는 게 나았다, 이게 웬 생고생이냐, 하늘의 뜻이면 다냐"라며 폭언을 퍼부으며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별보다도 힐데가르트를 아프게 했던 이별은 바로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제자 리햐르디스와 헤어져야 했다는 겁니다. 1150년 수녀원을 성공적으로 옮겨 낸 힐데가르트는 이듬해인 1151년 『쉬비아스』의 최종 완성판을 내는데, 폴마르와 더불어 이 저술 작업을 가장 많이 도왔다 할 수 있는 리햐르디스가 이 시기 힐데가르트를 떠납니다. 리햐르디스의 어머니인 슈타데 후작 부인은 그동안 힐데가르트를 많이 도와 왔음을 주지하며 리햐르디스를 브레멘(Bremen) 근처에 자리한 바숨(Bassum)의 수녀원장 자리에 앉힐 것이니 이해하라고 요구합니다. 거의 성직 매매에 가까운 방식이었던 데다, 가장 아꼈던 인물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상실감 때문에 힐데가르트로선 받아들이기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강력히 반발하고 고집을 부렸지만 결국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기껏 떠나보냈더니 그 이듬해인 1152년 10월 덜컥 죽었다는 소식으로 돌아와 스승을 더욱 낙담하게 합니다.
힐데가르트는 슬픔을 뒤로 하고 1158년부터 삶의 윤리학을 담은 두 번째 책 『책임 있는 인간(Liber vitae meritorium)』을 쓰기 시작해 1163년 완성합니다. 인간이 매 순간 선량함과 죄악 사이에서 어느 지점을 선택해야 할지를 책임지고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책임 있는 인간』의 작업을 마친 직후 힐데가르트는 곧바로 우주론인 『세계와 인간(Liber divinorum operum)』을 집필하기 시작해 1173년에 펴냅니다. 2013년 현재 우리나라에 정식 번역을 통해 소개된 힐데가르트의 신학서는 이 세 번째 저서인 『세계와 인간』이 유일합니다. 이 책은 다른 제목으로는 『하느님의 창조작업(De operatione Dei)』이라고도 하죠. 힐데가르트는 『세계와 인간』까지 펴냄으로써 신과 인간, 그리고 우주를 연결하는 삼위일체 3연작을 완성해냈습니다.
 
"앞에서 말한 영상은 오래 전, 계란의 모습으로 내게 나타났던 비전이다. 이런 형태가 세상만사의 성격들을 가장 잘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을 나타내는 원을 형성하는 여러 공기층 간의 유사성과 그 층을 구성하는 재료들의 차이점을 구분해내는 동시에, 그 둘레와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영상들이 어느 것 하나 이 세상의 형태를 포함하고 있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이 사실은 모든 측면에서 완전하며, 둥글고 회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둥글고 회전하는 공이야말로 이 세상의 형태와 가장 근접한 것으로, 이는 모든 세부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와 인간』을 집필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인 1165년에는 두 번째 수녀원을 세웠습니다. 남성 수도사에게서 독립해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수녀원을 세웠다는 사실이 힐데가르트의 이름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됐고, 힐데가르트르를 찾는 수녀들은 날이 가면 갈수록 계속해서 늘어났습니다.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만으로는 감당이 안 될 지경이 되자 힐데가르트는 결국 라인강 건너편 아이빙엔(Eibingen) 지방에 새 수도원을 짓고 양쪽의 원장을 함께 맡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빙엔의 힐데가르트(힐데가르트 폰 빙엔, Hildegard von Bingen)'이란 이름이 이즈음 붙었습니다.
 『세계와 인간』에 수록된 그림 『세계와 인간』에 수록된 그림
『세계와 인간』에 수록된 그림
한편 『세계와 인간』을 작업하고 있던 도중인 1171년 경 힐데가르트의 가장 오랜 이해자이자 스승이자 동료이자 비서였던 폴마르가 세상을 떠납니다. 『세계와 인간』이 1173년에 완성됐으니 거의 막바지였다고 봐도 될 터인데요. 남은 분량은 사촌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고 합니다. 힐데가르트는 폴마르의 후임으로 베네딕토 수도회의 고트프리트(Gottfried von Disibodenberg)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힐데가르트와 수도회 독립 건으로 싸웠던 베네딕토 수도원의 쿠노 원장이 죽은 뒤 뒤를 이은 헬렝가르(Helengar)까지도 꽤나 방해를 했던 모양입니다. 막상 어렵게 어렵게 데려온 고트프리트는 힐데가르트의 삶을 담은 전기 『Vita』를 기록하기 시작했으나 기껏 데려온 지 3년 만에 죽고 말았고, 『Vita』의 기록은 에히터나흐의 데오데리히(Theoderich von Echternach)가 마저 정리하게 됩니다.
중세 암흑기를 거침없이 내달렸던 힐데가르트는 1179년 9월 17일 세상을 떠납니다. 유복하고 독실한 귀족 신앙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몸이 많이 약했던 소녀는 천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회자될 저서와 에피소드들을 남기고 그 당시로는 매우 장수했다 할 수 있는 여든하나라는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요. 힐데가르트는 죽기 직전인 1178년까지도 파문 당했다 복귀한 청년 귀족의 무덤과 관련한 종교적이고도 정치적인 싸움을 마다 않고 부딪쳐 끝내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시체를 파서 내놓으라는 마인츠 대성당 참사회원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되레 시신에 축성을 한 다음에 무덤을 못 찾게 흔적을 없애는 바람에 공동체 자체가 파문을 당하는 대사건을 겪었죠. 비단 시신에 관한 문제여서라기 보단 힐데가르트에게 반감이 큰 인사들의 트집에 가까웠다 하겠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끝까지 싸워 결국 파문 철회를 이끌어내곤 그 반 년 뒤 홀연히 세상을 떴습니다. 그야말로 평생을 자기 위치에서 필요하다 싶은 부분을 관철하기 위해 싸운 당대의 여걸이었던 셈이었습니다.
생전 행한 업적과 기적 등 이 결코 가볍지 않아 성인으로 인정하자는 움직임이 1200년대부터 있어 왔지만 워낙 센 경력과 교권에 도전하는 듯한 자세 탓인지 시성되질 못했었는데요. 이미 독일어권 가톨릭교회는 1644년부터 힐데가르트의 사망일인 9월 17일을 축일로 기려며 이미 성녀 대접을 해 왔다고 하지요. 게다가 이미 로마 순교록에도 성녀로 올라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지난 2012년 5월 10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힐데가르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는 뉴스가 들려왔죠. 죽은 지 833년 만에 말이죠! 힐데가르트 폰 빙엔은 이제 공식적으로 '성녀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되었습니다. 힐데가르트가 우리나라에서 지금만큼 주목 받기 전부터 마음을 두고 있던 저에겐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 얼마 후인 2012년 10월 7일에는 교의 면에서 교회에 큰 기여를 한 학자에게 부여하는 칭호인 교회박사(doctor of the church)로도 선포되었는데 여성으로는 네 번째라고 합니다.
힐데가르트의 일대기를 조금 더 알고 싶으신 분은 영화 「비전(VISION) - 위대한 계시」를 찾아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2011년 가을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바 있는 독일 영화로, 힐데가르트의 삶을 쭉 훑어주기 때문에 힐데가르트 입문(?)으로는 꽤 괜찮습니다. 다만 그야말로 일대기에 가까워서, 힐데가르트가 일생 보고 기록하며 견지했던 세계관, 우주관 등의 철학은 거의 반영되지 않고 어떤 인물들과 어떻게 지내고 어떻게 싸우며 살아갔나 하는 점들을 부각하는 데에 그치고 있습니다. 기본 사고의 틀과 행동 원리를 빼놓고 나니 캐릭터가 신념과 확신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내가 비전을 봤다니까! 내 말이 맞다니까!"라고 약간 떼쓰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는 게 조금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래도 폴마르 신부님 역을 맡은 배우의 강렬한 표정 연기만큼은 확실히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 극 중 연극에서 악마 연기를 할 때 말이지요.
 

왜 지금, 힐데가르트인가?

 
흔히 힐데가르트를 논할 때, 이 언니가 보여준 어마어마한 능력에 먼저 눈이 가기 쉽습니다. 그도 그러할 것이, 힐데가르트에게 붙는 직업명(?)이 그야말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으니까요. 예언자에 수녀원장에 신학자라는 건 그냥 기본 스킬이었죠. 그림을 그리는 미술가였고 작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게다가 라틴어에 능숙하지만은 못하다는 이유로 라틴어와 독일어를 섞은 독창적인 문자를 직접 만들어 쓰기까지 한 언어학자였고 오페라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성덕의 열(Ordo Virtutum)」을 비롯한 노래를 지은 작곡가였으며 동식물 생태를 연구해 기록한 자연학자이자 자연의 치유력을 연구한 의사이자 약초학자, 카운슬러에 심지어 연극까지 제작한 극작가, 그리고 당시 교단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사회비평가기까지 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신학서 세 권은 그렇다 치고, 치료법이 두 권, 동·식물과 광물에 관한 기록물이 500여 편, 저희 WISELOTUS에서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원석/보석 테라피의 원류가 되는 보석 치료 관련 자료 다수, 작곡한 노래 77편, 서신 교류가 300여 통, 거기에 남이 쓴 거지만 전기 『Vita』…… 이쯤 되면 시쳇말로 먼치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지요. 신학과 의학, 생태학, 과학, 물리에 이르는 저 방대한 기록들 하나하나가 서양 문명의 요소요소에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악보힐데가르트의 악보
힐데가르트의 악보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지금 이 시대에 주목 받는 까닭을 빼어난 재능 때문만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다재다능한 인물을 굳이 꼽자면 힐데가르트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진 않을 테니까요. 힐데가르트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굵직한 키워드는, 아마도 '여성'이 아닐까 합니다. 여성인 것 자체로 무엇이 특출하겠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힐데가르트는 다름 아닌 중세 시대의 수녀였습니다. 중세라는 시기는 여성의 지위는 물론이고, 사회 질서 그 자체였던 종교에서도 여성성 자체가 완전히 제거돼 있던 시기였습니다.
힐데가르트가 살았던 중세 시대 교회는 남성 성직자를 중심으로 하는 제도가 매우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예수께서는 여성을 하대하고 열등한 것으로 해석하던 유대교와는 달리 성별이 아닌 믿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설파하고 행동하였음에도, 예수 이후 교회사는 원시 크리스트교의 교리 정립기에 스며 들어온 고대 그리스 철학의 이원론, 특히 그 가운데 영육이원론 등이 교묘하게 작용하여 여성을 종속 대상으로 놓는 여성열등, 나아가 여성혐오(misogyny)에 가까운 성차별 기조와 가부장 질서로 얼룩져 갑니다. 원시 크리스트교 시절 그리스 철학과의 결합을 통해 교회철학의 기틀을 다졌던 아우구스티누스나 중세의 대표적인 신학자라 할 수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마저 여성을 복종 대상, 정신이 본질인 남성에 대비되어 고깃덩이에 불과한 존재, 본래 남성만을 생산하도록 되어 있으나 어떤 요인에 따라 형상이 파괴되어 여성이 나오는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열등하며 번식을 위한 필요악일 뿐이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이러한 흐름을 굳히고 맙니다.
일례로 힐데가르트가 태어나기 전인 약 830년 무렵 프랑크 왕국 유디트(Judith) 왕비의 정적들이 "저 여자는 간통하는데다 왕을 유혹하기 위해 주술을 쓴다"라고 음해하며 왕비의 남자라는 소문이 있던 '셉티마니아의 베르나트(Bernard von Septimania)'의 여동생인 수녀 게르베르가(Gerberga)에게 마녀술을 쓴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한 일이 있었는데요. 수잔느 포네이 웸플(Suzanne Fonay Wemple)의 1981년 저서 『서유럽 사회 속 여성 : 혼인과 수녀원 생활 500~900(WOMEN IN FRANKISH SOCIETY : MARRIAGE AND THE CLOISTER 500 TO 900)』에 따르면 이 일이 서양사에서 여성을 처형하는 데에 법적인 근거로 '마녀의 주술'을 언급한 사례로는 처음이라고 하죠. 게르베르가는 무고한 희생양이었던 셈입니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종교가 정치와 굳게 맞물려 있던 중세 시기 여성은 얼마든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죽이기 좋은' 죄목을 종교 차원에서 덧붙일 수 있는 대상으로까지 그 지위가 추락해 있었다는 겁니다.
그 얼마 후에는 역사적인 첫 밀레니엄(?)이 별 탈 없이 지나가면서 성직자들의 종말론 장사와 재산 축재, 성 문란, 축첩, 교회 세습 등이 남긴 여파가 골칫거리로 드러나는 시기가 다가왔고, 이를 해결한다고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우스 7세가 1074년에 '혼자 살게 하면 자식도 없으니 돈 안 쌓아 놓겠지'란 발상을 바탕으로 하는 독신령(Zölibat : 쵤리바트)이란 수습책을 내렸다가 느닷없이 평생 명목상 동정남 생활을 하게 된 성직자의 첩들이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내몰려 나와 사회문제로 대두되기에 이르기도 합니다. 당시 사회 문제는 곧 정치 문제이자 종교 문제였고, 위정자이자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매우 편리한 방책을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이후 14~17세기까지 온 유럽권을 휩쓸고 다닌 마녀 사냥의 전조가 이 시기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수도회 또는 신앙 공동체란 하등한 존재 취급을 받던 여성들이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했지만 교육 아니어도 이런 암울한 시대에 그나마 여성들이 유일하게 몸을 안전하게 맡길 수 있는 곳이기도 했으니, 신앙심을 차치하고서라도 힐데가르트의 부모가 왜 유타에게 딸을 맡겼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하물며 이런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에 힐데가르트 같이 젊은 수녀가 "나 하느님이 내리신 환상을 보았어요"라고 말하고 다녔다면 어땠을까 하니, 유타가 환상을 보는 제자에게 왜 그리 조심을 시켰을지도 족히 짐작이 가지요.
이런 상황이었으니 힐데가르트는 세상에 자기가 본 비전을 내보이기 위한 결심을 할 때 마녀로 몰려 죽을 각오까지 해야 했을 겁니다. 물론 저명한 신학자였던 베른하르트에게 완성 전 책을 먼저 보냈던 일이라든지, 자신을 철저히 구약 시대의 예언자 위치로 놓은 채 '나는 무학(無學)이오, 하느님 말씀을 전할 뿐이오'라 했던 건 어떤 면에서는 매우 영리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봅니다. 남성들의 정치 역학 속에서 뜻을 펼치기 위한 위치 지정이었던 셈이지요. '여성' 힐데가르트는 중세라는 험난한 시기 속에서 영성으로서도, 또한 영민한 처세술과 강인한 정치력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이러한 면모가 잘 드러나는 사례 가운데 첫째로 들 수 있는 건 바로 신학 해석적 측면에서 남성과 여성을 어떻게 규정짓고 있는가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힐데가르트는 구약 이후 기본적으로 신의 모습에서 여성의 면을 부각한 첫 인물로, 남녀 모두가 신의 모습을 본 따 창조되었으므로 여성은 종종 하느님의 여성적 측면을 드러낸다고 보았으며, 남녀가 신 앞에 동등한 '사람'임을 말했습니다. 여성을 하등한 존재로 해석했던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석과는 상당히 다르지요? 또한 기본적으로 사용하던 어휘, 비전을 표현하기 위해 그렸던 수많은 만다라에서도 기존과 다른 여성성을 부여했습니다. 이를테면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비전을 적은 시구에 반복해 '어머니(Mutter)'란 표현을 쓰는가 하면, 신의 여성적 측면을 드러내는 데에 구약의 인물 소피아(Sophia)를 꺼내 구체화합니다. 지혜를 상징하는 소피아는 여성성을 지니고 있는 개념이었는데, 남성 중심의 교리 해석이 강해지면서 강제로 잊혀지다시피 한 개념이었습니다. 여기에 만다라 형태로 그린 비전의 형상에선 원형과 곡선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그 자체로 여성적인 이미지이자 어떤 위치에서도 위계의 압박을 받지 아니하는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하느님과 신성의 여성성을 강조하던 힐데가르트도 신의 피조물로서 남녀가 모두 그저 '사람'일 뿐이라고는 하나 결정적인 부분에선 여성은 육체적으로 연약해 남성의 보호가 필요하기에 남성 우위의 사회 구조를 허용하였다는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이는 중세 시대를 살았던 힐데가르트의 한계로도 볼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그 시기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뜻을 저항을 줄이며 관철할 수 있게끔 안배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였기에 힐데가르트가 일정 부분 교황과 제후, 귀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셈이고요.
주목할 점은 포장이 아니라 속입니다. 남성 수도원의 부속되어 있을 뿐이었던 수녀원을 독립시킨 일은 그 자체로도 놀라운 발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남자인 신부를 거치지 않아도 하느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존재들이다"라는 일종의 선언이란 점에서 큰 상징을 지닙니다. 힐데가르트는 신의 목소리, 즉 비전과 함께한다는 자신감을 필요한 부분에선 거침없이 드러냈고, 정치적인 이슈라 쓰고 보수적 시선을 지닌 기득권층의 시기와 질투라 읽어도 될 법한 대상과의 싸움에선 지지 않고 맞받았으며, 심지어 신학서 속 세밀화 속에 자신을 등장시키는 과감함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그 무엇보다도 확실히 한 셈이죠. 또한 그 시기의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설교 여행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대상은 수도원에 돈을 내는 귀족 집안들만을 향하지 않고 그 자체로 하느님 백성으로서 동등한 이들 앞에 섰지요. 그래서 『역사 속의 페미니스트』의 저자 거다 러너(Gerda Lerner)는 힐데가르트를 페미니스트의 맏언니뻘로 무게감 있게 다루며 '스스로 세운 권위'라는 제목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성'이라는 화두가 비단 엄혹했던 시대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써만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 이 시점 힐데가르트가 다시금 떠오르는 이유, 저는 힐데가르트가 온 삶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준 행동 방식과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들이야말로 힐데가르트가 남긴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힐데가르트는 그 자신 자체로도 그 시대에 크나큰 파격이었지만, 이 유산들은 80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에 와선 문명사회의 극단에 서서 끝 갈 데 없이 망가져 가는 현대 인류에게 비어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세계와 인간』이 전하는 마지막 비전은 다름 아닌 세계의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 이 장에 드러나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요즘 우리네가 눈 앞에서 목도하고 있는 지옥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원소의 대혼란'이라는 표현을 보고 있자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몇 가지 위기가 있을 겁니다. 특히나 그 가운데 방사능이라든지 방사능이라든지 방사능이라든지말이죠. 그 이외에도 광우병이라거나, 금융대란이라거나, 전쟁이라거나. 참으로 다양한 혼란들이 눈앞에 그려지는데, 그 많은 위기의 면면에서 우리는 이기적으로 깨진 균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높은 효율을 핑계로 수습할 수 없을 무언가를 빚어놓고는 사고가 터지고 나서 어쩔 줄 몰라하는 상황을 지금 이 순간에도 숱하게 보고 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어느 한 쪽만을 추구한 결과물입니다. 마치 중세 시대의 남녀관처럼 말이지요.
힐데가르트는 이 지점에서 생태적 여성주의의 틀을 제공합니다. 힐데가르트의 말에 따르면 인간 모두가 동등하게 신의 모습을 본 따 빚어졌으며, 온 세상은 하느님의 운동장 같은 곳이고 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생물과 인간이 모두 다 하느님의 충만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울러서 그 자체로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성사기도 합니다. 힐데가르트는 『쉬비아스』에서 『세계와 인간』까지 신학서를 셋으로 나누어 집필하고 그 의미를 삼위일체에 두었는데, 성부 성자 성신이라는 삼위일체의 틀에 빗대 신과 인간 그리고 우주의 이야기를 담아냈습니다.
이를 해석해 보자면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만이 우월한 것이 아니요, 지구의 만물에는 신의 섭리에 따른 의미가 부여돼 있으므로 그 모든 것에 균형과 조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며, 그 방법은 '소피아'가 나타내듯 지혜와 사랑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신학적인 비유라는 점을 빼놓고 본다 해도, 이 시대의 위기는 지혜도 사랑도 없이 균형을 스스로 깨는 데에서 우리 인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남성들의 탓이다 식으로 매도하는 게 아니라, 극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열쇠말을 힐데가르트의 비전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이 시점, 기본 태생이 매우 보수적이기 이를 데 없는 가톨릭 교단이 힐데가르트를 뒤늦게나마 성인의 반열에 올린 이유도 다른 데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허물이 컸고 지금 현재도 분명 클지라도, 세계 종교란 결국 인류 구원이라는 메시지와 세계의 위기라는 화두에서 눈을 돌려선 안 되기 때문이겠지요. 하물며, 정말로 이 지구를 인간 손으로 인간이 살지 못하는 땅으로 만들지도 모를 위기 앞에서는 더욱이 말입니다.
 
(c) 2013, 서찬휘
 
 
 

참고문헌

 
  • 『세계와 인간』 /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 / 1171 / 2011(한국어판)
  • 『역사 속의 페미니스트』 / pp39-70/ 거다 러너(Gerda Lerner) / 1993 / 1998(한국어판)
  • 『한국판 브리태니커 9』 - 베르나르두스 / pp325~326 / 1993
  • 『서유럽 사회 속 여성 : 혼인과 수녀원 생활 500~900(WOMEN IN FRANKISH SOCIETY : MARRIAGE AND THE CLOISTER 500 TO 900)』 / p95 / 수잔느 포네이 웸플(Suzanne Fonay Wemple), 1981
  • 『빛과 소금』 - '거룩한 음악을 사랑한 빙엔의 힐데가르트' / 유지황
  • 「우리 시대의 여인, 힐데가르트」 / 정홍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