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보리(Calvary) 또는 골고다(Golgotha)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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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10, 2021 01:2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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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십자가의 길
갈보리(Calvary) 또는 골고다(Golgotha)는 복음서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벽 밖에 자리하고 있는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곳으로 골고다(그리스어: Γολγοθᾶ; 또는 Γολγοθᾶς)는 아람어 골가타(Gûlgaltâ)가 그리스어로 번역되며 붙여진 이름으로 성경에서는 "해골의 장소"라는 뜻으로 그리스어 크라니오누 토파스(Κρανίου Τόπος, Kraníou Tópos)라 번역하며 라틴어로는 갈바리에 로쿠스(Calvariæ Locus)라 하는데, 여기서 영어 갈보리가 파생되었다. 골고다는 초기 문서에는 예루살렘 바로 인근에 있는 해골을 닯은 언덕이라 언급하고 있는데, "골고다라는 곳은 – 옛 선조들은 그 이름을 '머리의 해골 모양으로 움푹들어간 땅(The skull-pan of a head)"이라 불렀다 하고 있다. 333년 이후로는 작은 언덕이라 하는데, 6세기 이후로는 산이 있는 곳이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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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 성묘소 교회를 지나고 있다. Jerusalem
4대 복음서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끌고 골고타라는 곳으로 갔다.
골고타는 해골산이라는 뜻이다." - 마르코 15:22
"그리고 골고타 곧 해골산이라는 데에
이르렀을 때에," - 마테오 27:33
"해골산이라는 곳에 이르러 사람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죄수 두 사람도 십자가형에 처하여
좌우편에 한 사람씩 세워 놓았다." - 루카 23:33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성밖을 나가
히브리말로 골고타라는 곳으로 향하셨다.
골고타라는 말은 해골산이라는 뜻이다.: - 요한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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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소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갈보이 또는 골고다(Golgotha or Calvary), Jerusalem
일부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유대교 전승에서는 골고다라는 지명이 아담의 해골 장소와 관련있다 전하는데, 노아의 맏아들 셈과 멜키세텍이 노아의 방주가 있는 곳에 가 아담의 사체를 그곳에서 되찾아와 천사의 안내로 동쪽 중심에 있는 해골모양의 언덕 골고다에 안치했는데, 이곳에는 인간의 몰락 이후 저주 받은 뱀도 이곳에 묻혔다 한다. 전승에는 "카타프 알-마칼(Kitab al-Magall)", "아담과 이브 그리고 사탄의 충돌(Conflict of Adam and Eve with Satan)", "보물의 동굴(Cave of Treasures)",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유티키우스(Patriarch Eutychius of Alexandria)의 저술 같은 다수의 고전 자료 등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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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325년 고대 로마에서 그리스도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는 예수의 무덤을 확인하였고 그 인근에서 예수께서 매달린 십자가를 확인하였다 하며 여기서 또한 전통적인 골고다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주장한다. 그리고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수난지인 그 자리에 거룩한 묘 교회(聖墓 敎會, Church of the Holy Sepulchre)를 세웠다. 헬레나 황후에 의해 그리스도 수난지로 확인되기 이전에 이곳은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봉헌된 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성당은 이 사원의 담과 원형건물 로툰다(Rotunda), 회랑(Cloister)을 그대로 활용하며 세워졌다. 여기서 회랑 만은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 수도원 본당인 카틀리콘(Catholicon)과 갈보리 예배당(Calvary chapel)으로 바뀌었다. 또한 사원 담은 11세기 경에 홰손되었으나 복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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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에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곳을 성지로 여겼으나 하드리아누스는 일부러 순교당한 교인들을 이곳에 묻고 그 위에 자신의 사원을 세어 노골적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자신의 반감을 표시하였다. 하드리아누스 사원이 세워지고 난 뒤 30년 후인 160년 경에 초대교부 사르디스의 멜리토(Melito of Sardis)는 이곳을 2세기에 세워진 하드리아누스 사원에 대비되는 "도시의 중심, 거리의 중심(Tomaso Albinoni - Adagio in G Minor)"이라 설명하고 있다.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 그 폐허에 세워진 하드리아누스의 도시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같은 전형적인 로마의 도시들은 하드리아누스의 격자 계획이라 부르는 그리드 플랜(grid plan)에 의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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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시내 중심가인 카르도(Cardo)를 지나는 카르도 막시무스(Cardo Maximus) 남북 간선도로 - 지금의 수크 칸 알 자이트(Suq Khan az-Zait)와 동서로 뻗은 데마쿠누스 막시무스(Decumanus Maximus) 간선도로 - 지금의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즉, 갈보리 언덕으로 이르는 "고난의 길"이가 격자 형태로 도시의 기본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광장은 전통적으로 이 두 간선도로 교차점에 위치하였고 이에 따라 주 사원은 광장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 사원이 자리하고 있던 사원산(Temple Mpunt)와 10군단(Tenth Legion)의 야영지이던 서쪽 언덕 때문에 하드리안의 예루살렘은 두개의 카르도를 가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두개의 간선도로 데마쿠누스 막시무스와 이에 따른 2개의 광장과 몇몇의 사원들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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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광장, 지금의 무리스탄(Muristan)은 서쪽 카르도 교자점에 자리하고 아프로디테 사원이 있는 지금의 엘-바자/다비드가(El-Bazar/David Street)는 서 카르도와 비아 돌로로사 교차점에 자리하게 되었다.
신약에서 골고다는 "예루살렘과 가깝기 때문에" (요한 19:20), 그리고 "성문 밖에서" (히브리 13:12)라 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하드리안의 도시 엘리아 카피톨리나 중심가인, 예루살렘 구시가지 성벽 안에 위치한다 여기는데, 이 지역에 대한 전통적 확인에 대한 확실성에 대해 몇가지 의문점들이 제기된다.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골고다의 확실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유대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벽이 예수 시대를 좀 더 확실하게 증명해 줄 수 있다 주장하며 이 자리는 성벽 밖으로 헤로데 아그리파(Herod Agrippa)가 41–44년 오늘날 북쪽 벽 너머인 북쪽으로 확장시켰으며 서쪽 벽도 쌓았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한다. 2003년 옥스포드 그리스도 교회 교구장이었던 교수 헨라 챠드윅 경(Professor Sir Henry Chadwick)은 하드리안의 도시 설계자가 구도시를 재설계할 때, 이들이 "신도시 성벽 안에 골고다를 가져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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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갈보리라 여기는 장소가 두 곳으로 그 중 하나일 것이라 주장하는 일부 개신교 학자들은 성벽 밖에는 해자같은 방어용 수로가 가 있어 초기의 성벽은 골고다에 바로 연결되지 못했고 골고다와 붙어있는 사원산은 예루살렘 안의 성벽을 두문드문 연결하게 하여 방어에 편리한 서쪽 언덕 보다 전통적으로 성벽 밖이라 여겨지는 자리인 중앙 골짜기인 티로피언 골짜기(Tyropoeon Valley)의 낮은 부분까지 연결되었다 주장한다. 이러한 지리적 연구는 성벽 안의 언덕이 이로 부터 성벽을 타고 넘어와 공격 당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검토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19세기의 일부학자들과 팔레스타인 탐험 기금으로 측량된 작업에 의하면 이 계곡 안의 신도시는 언덕을 잘라내고 조성되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2007년 예루살렘 시 고고학자이며 바르 일란(Bar Ilan) 대학의 이스라엘 영토학 교수인 단 바핫(Dan Bahat)은 "성 묘소 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1세기 경의 여섯 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이 예루살렘 성 밖이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며 "전략적 약점"과 "방어용 수로"였다는 가설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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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광장은 동쪽 카르도와 비아 돌로로사 교자점에 있는 사원산 북쪽에 자리하여 정상에 세워진 주피터 카피톨리누스 사원과 인접해 있었다. 하드리아누스가 이교도 사원을 바꾼 또 다른 유명한 성소로 베데스다의 못(Pool of Bethesda)이 있는데, 아마 이는 요한서 5:2의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베짜타라는 못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행각 다섯이 서 있었다."(5:2)에서의 예수께서 중풍 환자를 고치신 이곳은 BC 8세기 경, 이 베짜다 계곡(Bath Zeth Valley)에 빗물을 모우는 작은 저수지를 만들어 수로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물을 공급하였는데, AD 2세기 하드리안 시대에 새로이 조성된 하드리안의 도시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가 세워질 때 이곳에 있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을 확대하여 그리스의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와 이집트 "지하 세계의 신" 세라피스를 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와 세라피스 신전(Temple of Asclepius and Serapis)으로 만들었다. 이후 사원은 비잔틴 시대에 교회로 바꾸었으나 무슬림에 의해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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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1978년 동안 골고다 교회 안과 성 묘소 그리고 무리스탄(Muristan) 인근의 복구와 탐사 작업이 진행되었다. 여기서 이 지역은 원래 흰색 멜레케 석회암(white Meleke limestone)을 캐는 채석장이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지금도 예배당 안쪽으로 부터 접근 가능한 성 헬레나 예배당의 북동쪽에 길이 7m에 3 x 4.8m 크기의 채석장 일부가 남아있는데 전통적으로 이 지역이 골고다라 믿고 있다. 갈보리 예배당이 바위 아래 부분에 자리하게 설계되어 있는데, 나머지 부분은 예배당 아래 아담의 무덤이라 알려진 곳에 남아있다. 프란체스코회 고고학자인 비르질리오 코르보(Virgilio Corbo)는 탐사를 통해 시내에서 보면 작은 언덕이 해골같아 보인다 하고 있는데, 이 언덕은 지금도 남아 있다. 1986년 역사학자 조지 라바스(George Lavas)와 건축가 테오 이드로포울로스(Theo Mitropoulos)의 갈보리 예배당 마루 바닥 보수 공사에서 바위에 난 지름 11.5 cm의 둥근 구멍이 발견되었는데,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아프로디테 사원 시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라바스는 이 구멍에 2.5m 높이의 나무 기둥을 충분히 세울 수 있는 점으로 볼 때, 이 구멍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웠던 자리라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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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묘 교회(聖墓 敎會,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갈보이 또는 골고다(Golgotha or Calvary), Jerusalem
보르도 순례기
333년 보르도 순례자들이 동방의 콘스탄티누스 교회로 찾아가 남긴 "보르도 순례기(Itinerarium Burdigalense)"에서 ... "왼쪽에는 작은 골고다 언덕이 있는데, 그곳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거기서 돌을 던지면 떨이질 거리에 지하묘소 크립타(crypta)가 있는데 고곳에 예수의 시신이 안치되었다가 삼일 후에 부활하셨다. 그곳에는 지금은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명에 의해 대성당이 세워져 있는데,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교회라 말할 수 있다."라 전한다. 예루살렘의 키릴로스(Cyril of Jerusalem), 즉 예루살렘의 전도사들은 콘스탄닌 성당의 초기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들은 골고다의 여섯개의 순례길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골고다가 교회 인근에 자리하고 있어 자신과 순례자들이 이 곳에 모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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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 위에 서있어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성스러운 언덕 골고다와 성 묘소와 돌들을 볼수 있다."라 전한다. 383년 에게리아 순례자(pilgrim Egeria) 또한 "…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골고다에 자리하고 있다.…"라 하고 있다. 또한 리용의 네우케리우스(Eucherius of Lyon) 주교는 440년 섬의 장로 파우스투(Faustus)에게 쓴 글에서 "골고다는 예수의 수난지인 아나스타시스(Anastasis)와 순교지기념성당(Martyrium) 중간에 있는데, 이곳의 바위는 아직도 주께서 매달리신 십자가를 지탱하고 있다."라 전한다. 530년 경에 쓰여진 여행기인 "브레비아리우스 데 히에로솔리마(Breviarius de Hierosolyma, 예루살렘의 요약)"에서는 "(성당 중간에서), 골고다로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커다란 앞마당이 나온다. 바로 이곳에 주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곳이다. 언덕 주변에는 온통 은막이 드리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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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라 여기는 두 곳
전통적으로 갈보리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1842년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의 조사를 바탕으로 하여 드레스덴의 독일 신학자 오토 테니우스(Otto Thenius)는 처음으로 다마스커스 문 북쪽의 바위 언덕이 성서의 골고다이라고 발표하였다.1882–83년에는 1860년 영국과 청간의 에로호 사건 때베이징을 공격하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챨스 조지 고든(Charles George Gordon)은 이후 이집트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1882-3년 이 지역을 발굴하고 갈보리가 틀림없다 확인하여 이곳을 "고든의 갈보리"라 부르는데, 오늘날 "해골 언덕"이라 부르는 이곳에는 언덕 아래에 해골의 눈같아 보이는 두개의 움푹한 구멍이 파여있는데, 이로 인해 이곳이 해골 모양으로 보여 골고다로 알려지게 된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부근에는 오늘날 정원 무덤(Garden Tomb)이라 부르는, 고대에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이 있는데, 고든은 이를 예수의 무덤이라 추정하였다. 정원 무덤에는 몇몇의 고대 매장터가 있는데, 고고학자 가브리엘 발케이(Gabriel Barkay)는 이 무덤이 7세기 경에 조성되었으며 이곳은 아마 1세기 경에 버려졌다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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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경의 역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는 로마의 예루살렘 파괴 이전에는 시온산을 예루살렘의 서쪽산을 지칭하였다 하는데, 지금의 시온산을 말하는데, 남쪽에 정원 무덤과 성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또 다른 한 곳은 독일 선교사 로저 두삿코(Rodger Dusatko)가 주장하는 "사자의 문" 밖에 있는 두개골 모양을 한 언덕으로 북동쪽 200m 지점의 사원 입구에 있었는데, 4대 복음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장소를 그리스어 '크라니온(Kranion)'이라 하는데, 이는 두개골이란 뜻에서는 그리스어 "스쿠피온(Skufion, 영어 스컬(skull)"과 같은 뜻이나 영어의 크라니움(cranium)은 해골의 하악부를 제외한 두개골 상부를 의미한다. 공관복음서는 예수께서 숨을 거두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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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이른 초기의 아람어 복음서 "타티안(Tatian)의 디아테싸론(Diatessaron)"와 "교부들(Church Fathers)"의 글에서는 사원 입구의 휘장이 찢어진 것이지 지성소 안에 드러워진 휘장이 찢어진 것이 아니라 한다. "그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마르코 15:38)는 사원이 성벽 밖 북동쪽의 사원산에서 동쪽을 향하고 있어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장막이 찢어지는 것이 성문 안의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다 한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이 예루살렘에서 가깝기 때문에"(19:20) 많은 유다인들이 십자가 위에 붙여진 "유대 왕 나자렛 예수"라 쓰여진 명패를 읽었다라 하고 있다.
또한 시편 69:12 :성문께 모여 서서 내 이야기로 입방아를 찧고 술에 취하면 나를 빈정거려 노래합니다"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곳이 성문에서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는 소리를 들을만한 거리라는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 카이사레아(Caesarea)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가 330경 성서에 나타난 지명 약 300곳의 목록을 수록한 성서지리사전 "오노마스티콘(Onomasticon)"에는 골고다가 예루살렘 성밖의 고대 시온산 북쪽의 언덕이라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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