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작가
올리버 색스
장르/분야
에세이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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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한줄 평
무미건조한 기록으로서가 아닌 삶에 대해 관조하는 신경학자의 임상사례들.
평점
⭐️⭐️⭐️⭐️⭐️
노트에는 사실과 감상이 하나로 얽힌 여러 문장들이 뒤범벅되었다. 긴 문장이 있는가 하면 조목조목 적어놓은 요점만 있기도 했다. 그에게서 보이는 문제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순간순간마다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가없은 남자가 누구이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지... 등의 문제를 여려모로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이처럼 기억이 끊겨서 연속성을 잃어버린 존재를 과연 '존재' 라고 말할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그는 뿌리가 없는 인간이었다. 아니 먼 과거의 일에만 뿌리가 남은 사람이었다. 흄은 이렇게 말했다. 감히 말하자면…… 우리는 무수히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차례차례 계승되고, 움직이고, 변하며,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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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처음에는 지미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력적이고 호감이 가는 사람인데다 두뇌 회전도 활발하고 지적이었기 때문에 고치기 어렵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정도로 기억상실증이 심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고 또 경험한 적도 없었다. 모든 것, 모든 경험, 모든 사건을 완전히 지우고 마는 블랙홀, 모든 세계를 삼켜버려서 아무것도 남겨놓지않는 심연.
 
 
지미는 '공간화된' 시간(동질적 단위에 의해 분할되고 구분되는 공간화된 시간. 이런 시간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따로 놀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거나 서로 침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옮긴이)에서는 완전히 길을 잃었지만, 베르그송이 말한 '의도된' 시간 안에서는 완벽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표면적인 구조를 보면 두서없고 터무니없는 것도 예술 혹은 의지의 관점에서 보면 완벽한 정합성과 안정성을 지닐 수 있는 법이다.
 
사물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너무도 단순하고 친숙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늘 눈앞에 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것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법이다. -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이 인식론에 대해 쓴 이 구절은 생리학과 심리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셔링턴이 '우리의 비밀스러운 감각 즉 제육감이라고 부른 것에는 딱 들어맞는다. 제육감이란 근육, 힘줄, 관절 등 우리 몸의 움직이는 부분에 의해 전달되는, 연속적이면서 의식되지 않는 감각의 흐름을 말한다. 우리 몸의 위치, 긴장, 움직임은 이 제육감을 통해서 끊임없이 감지되고 수정된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자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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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벼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완전한 기억상실 뿐이다. 그것만이 내 삶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다.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 루이스 부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