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맡았던 배역, 즐거우셨나요? <시네도키,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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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코프만(Charlie Kaufman)의 2008년작, <시네도키, 뉴욕>(원제 <Synecdoche, New York>)입니다. 코프만은 <이터널 선샤인>(원제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의 각본가이자 <존 말코비치 되기>(원제 <Being John Malkovich>, 1999)의 감독으로 유명한데요, 그 외에도 <어댑테이션>(원제 <Adaptation>, 2002) 같은 영화를 보면, 작품활동을 통해 일관적으로 인간의 무의식과 자의식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지난 주말에 본 <시네도키, 뉴욕>(원제 <Synecdoche, New York>, 2008)은 보고 난 다음 날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낯설게 바꿔버렸습니다. 쉽지 않은 영화여서 아직 이해하려는 과정 중에 있지만, 인상이 조금이라도 더 생생할 때 글로 남겨 공유하려고 해요. 극작가 ‘케이든’의 삶에 위기가 왔습니다. 화가이자 아내인 ‘아델’과의 관계는 냉장고 속 우유처럼 유통기한이 지나버렸고, 집은 배관이 터지고, 건강에 이상징후가 생기고, 자기 작품은 외부에서 호평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존중받지 못합니다. 결국 아델이 딸 ‘올리브’와 함께 베를린으로 떠나 버리면서 가정은 무너지고, 건강은 자꾸 안 좋아지는데, 자신의 예술성은 세계가 인정해 ‘맥아더 기금’을 받습니다. 그 돈으로 뭔가 의미 있는 ‘진짜’를 만들고자, 어마어마한 무대를 꾸미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계획된 연극의 내용은, 모든 배우들이 거대한 무대 위에서 각자 본인의 삶을 연기하는 것 뿐이에요. 수십 년째 리허설만 하고 본 공연은 하지 않는 와중에 무대의 크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커져, 끝에는 웬만한 도시 하나의 크기가 됩니다. (<트루먼 쇼>의 세트장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급기야는 케이든을 따라다니며 조사해왔다는 ‘새미’(톰 누넌 분)까지 캐스팅하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여자관계도 두 번 더 실패하고, (이쯤 되면 다분히 정신적 문제인 것으로 보이는) 건강문제도 악화되는데요, 케이든은 어떻게 될까요? 이 거대한 무대와 이 많은 배우는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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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연극을 기획하게 된 배경은 명백해 보입니다. 자신의 가정과 본인의 신체를 자기 마음대로 붙잡아 둘 수 없게 되면서,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연극’에 집착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부인이 집을 떠나자마자 거의 바로 한 것은 청소입니다. 저도 가끔 집 청소를 하면 제 삶을 제가 잘 통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지는지라, 아주 공감이 잘 되더군요.) 수십 년간 진행되는 이 연극의 리허설은 참 소름 끼치게 우스꽝스럽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걷지 않아!!”
자꾸 ‘자연스러움’을 강박적으로 요구하는 감독 케이든부터,
“다시 봐주세요, 그럼 이건 어때요? 자연스러운가요? 감독님? 감독님!!” 자신이 하고 있는 게 연기라는 걸 자각하면서 걷는 법조차 까먹은 배우,
“당신은 ‘헤이즐’을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헤이즐이 좋아요.” 자아를 잃고 그 캐릭터가 되어버린 배우까지.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가 따로 없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작품 속 캐릭터의 목소리를 빌려 ‘세상은 무대고, 모든 사람은 배우’일 뿐이라고 했고, 쿤데라는 거기에 더해 ‘인생은 리허설 없는 본공연이자 본공연이 없는 리허설’이라고 하며 허무함 속에서 재미와 아름다움을 찾았지요. 인생이 연극이라는 말, 다들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그럼 도대체 진짜는 뭐고,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애초에, 그런 게 있긴 한 거고, 있다면 찾아야 하는 걸까요?
이 영화의 제목에 포함되어있는 ‘Synecdoche’는 주인공이 사는 곳의 지명 ‘Schenectady’와 발음이 비슷한 단어인데, 번역하면 ‘제유’라고 합니다. 위키에서는 ‘상위개념을 하위개념으로, 혹은 하위개념을 상위개념으로 바꾸는 은유의 일종’이라고 하네요. 케이든이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제 세상과, 감독으로서 엄청난 힘을 쓸 수 있는 무대 사이의 관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영화가 진행되면서 케이든은 “제목을 뭘로 할지 알겠어.”라고 하고 <시뮬라크럼>(Simulacrum : 실제 것의 표현/모방 – 외에도 철학에서 다양한 뉘앙스로 많이 쓰이는 것 같은데 전문분야가 아니니 넘어가겠습니다), <흐린 세상을 비추는 흐린 달빛> 등 여러 가지 제목을 갖다 대보는데, 케이든이 이 연극을 통해 세상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되는 것을 그때그때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쓰입니다. 코프먼은 은연중에 아델(케이든의 전부인)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는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보려 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인 ‘맥신’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그 맥신과 <시네도키 뉴욕>의 아델에 같은 배우 캐서린 키너를 캐스팅 했으니, 어쩌면 ‘캐서린 키너의 손을 들어준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키딩> 보신 분들! <키딩>의 ‘디어드러’예요!)
그대로 자신의 삶을 사는 게 좋아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체험을 한 번도 안 해보는 지독한(?) 맥신이 다른 인물들과 대비되었듯이, 여기서도 자꾸 작품의 규모를 키우고 중요하고 의미있고 큰 무언가를 이뤄내는 데에 목매는 케이든과 대조적으로 아델은 점점 더 작은 그림을 그려나갑니다. 케이든의 무대가 도시 크기가 되었을 때, 아델의 유화는 맨눈으로 보이지 않아 돋보기를 써야 하는 크기가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크게 성공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안타깝게도, 주인공 케이든이 아닌 아델이에요.
영화가 케이든을 이끄는 ‘성장’의 방향도 ‘맥신/아델 같은 삶’을 향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 속에서 케이든은 세 번에 걸쳐 각기 다른 타이밍에 “I know how to do the play.”, “I know how to do it now.”, “I know what to do with this play now.”라고 합니다. 제목을 정하고 바꾸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연극을 어떻게 할지 알겠다는 뜻인 동시에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할지 알겠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다른 분들이 보시면 어떻게 다르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첫 번째 “I know how to do the play”에서는 케이든이 연극 감독으로서 - 절대자, 일인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다”고 한 것 같고, 두 번째 “I know how to do it now”는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은 위치에 있는 한 명의 배우로서 “이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다‘고 말한 것 같았고, 마지막 “I know what to do with this play now.”는 마치 ‘play’를 ‘연극’이 아닌 ‘놀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처럼 들렸습니다. 특히 마지막 “I know what to do with this play”는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의 일부인데,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Little Person>이라는 노래 가사를 귀기울여 들어보면 더욱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I’m just a little person, one person in a sea of many little people who are not aware of me. (...) Let’s have some fun. Life is precious every minute, and more precious with you in it. (...)”
과한 자의식과 자기연민의 늪에 빨려 들어가고, 또 거기서 조금씩 빠져나오는 케이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마지막으로, 그런 거 다 신경 쓰지 말고 순간을 즐기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신만 보지 말고(<시네도키, 뉴욕>),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지 말고(<존 말코비치 되기>), 온전히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이 ‘진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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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영화를 꽤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코프먼의 각본과 연출, 편집 면에서 낯설고 어려운 구석이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엔딩 크레딧에 나온 노래 한 곡이 전체 영화보다 훨씬 친절하게 다가왔어요. 제목이 제목인 만큼 디테일한 은유와 상징들도 많이 있었는데, 반의 반도 제대로 이해를 못 한 것 같아요. 단적으로 헤이즐의 집은 왜 항상 불에 타고 있는 것이며, ‘에릭’이라는 인물은 도대체 누구이며, 케이든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하는 게 영화를 보면 볼수록 아리송해지기만 하고 해결이 안 되었어요. 편집은 사건의 순서나 시간의 흐름이 좀 당황스럽게 느껴졌고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렇게 ‘해설이 필요한’ 영화는 제 취향과 좀 어긋나는 면이 있지만, 그런 디테일을 놓치면서 봤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인상 깊었습니다. 무엇보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적어도 2일차인 오늘까지는 효력이 강하게 남아있네요.) 곱씹으며 주변 세상과 타인과 스스로를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미 보신 분이 있다면 감상도 궁금하네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도 아직 이해의 과정 속에 있는데, 다른 사람의 평론이나 해설을 보고 쓰면 제 글의 순수함(?)을 잃을 거 같아서 검색은 최소한으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나 잘못 설명한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관심이 가시는 분들은 직접 보시고 더 정확한 설명, 더 사적인 감상, 추가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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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챠랑 넷플릭스에 없어서 저는 네이버 영화에서 1000원에 구매해서 봤습니다. 자막이나 화질 상태가 좀 별로였어요. 다른 더 좋은 플랫폼에서 이 영화를 찾으신 분 있으시면 공유 부탁드려요.
예고편 링크
OST ‘Little Person’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