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연(2019, 커뮤니케이션북스)

 
notion imagenotion image
 
《만화·웹툰 작가 평론선 - 한혜연》
커뮤니케이션북스 발행
2019.09.30
118쪽
128×188×20mm
ISBN 9791128811142
 

책 뒷이야기

 
한혜연 편은 윤승운 편에 이어 제안 받은 만화·웹툰 작가 평론선. 2019년에는 김진태 편과 함께 진행했다. 윤승운 편에서 한 차례 경험해 본 다음이라서 자료 조사와 집필의 어려움과는 별개로 주어진 집필 형식의 생소함에 따른 시행착오가 확실히 줄었던 책. 순정만화의 계보에서 굉장히 독특한 위치에 서 있는 한혜연이라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정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소중한 기회였지만, 비교적 중단편을 중심으로 활동해 왔던 작가의 비블리오그래피를 좇아 정리하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난도를 자랑했다. 어쨌든 작가 한혜연를 이해하는 데에 일정 부분 의미 있는 정리를 해냈다는 자평을 내려 본다.
 

출판사 책 소개

 
1990년 초 데뷔한 이래 20여 년에 걸쳐 한혜연은 독특한 자기 빛깔을 지닌 만화들을 선보여 왔다. 그의 만화는 순정만화는 물론 한국 만화를 통틀어서도 쉬 보기 어려운 본격 미스터리 만화, 다양한 여성의 언어를 반영해 인간관계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여성 만화, 크리스마스 때면 꾸준히 독자들을 찾아온 크리스마스 단편으로 구분되어 왔다. 하지만 한혜연 만화는 비단 이에 국한하지 않는 다채로운 구분점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이 한혜연의 만화 세계가 지닌 담백하고 담담하되 견고하고 집요한 매력과 이들 매력이 자아내는 다층적인 깊이가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차례

 
01 한혜연의 삶 02 만화가 데뷔 전후의 토양과 맥락 03 미스터리 전문 만화가 04 한혜연의 여성 만화와 페미니즘 05 크리스마스 만화가 06 개그만화가 한혜연? 07 한혜연표 여성 만화의 리얼리티 08 리얼리스트 한혜연 09 인터넷 시대의 한혜연 10 연구자, 교육자 한혜연
 

서문

 
한혜연, 담백하고 담담하되 견고하고 집요한
‘크리스마스’ 하면 여러 가지가 떠오르지만, 그 가운데 ‘만화가’를 거론한다면 그 대표로 ‘한혜연’이라는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한혜연은 본인도 스스로를 ‘크리스마스 만화가’라 소개할 만큼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단편을 많이 그렸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단편집 󰡔그녀들의 크리스마스󰡕에 이어 󰡔어른들의 크리스마스󰡕에 수록된 단편들을 비롯해 네이버 웹툰의 ‘한국만화거장전’에 2014년, 2017년 두 차례에 걸쳐 실은 단편에 이르기까지, 오랜 만화 독자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으레 한혜연의 단편이 나오는 때고 안 나오면 서운하기까지 한 날이 되었다.
하지만 만화가 한혜연을 일컫는 표현은 ‘크리스마스 만화가’만이 아니다. 한혜연은 1993년 데뷔한 해부터 크리스마스 단편을 그리긴 했지만, 시작부터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이름으로 부각된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이전에 한혜연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이름은 바로 ‘미스터리, 공포 전문 만화가’다. 한혜연은 비교적 데뷔 초기부터 미스터리를 중심으로 묶이는 연계 장르인 공포, 스릴러, 추리에 본격적으로 특화한 단편들을 통해 당시 순정만화는 물론 한국 만화 전체를 통틀어서도 쉬 보기 어려운 장르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작가로 각인되었으며, <일루젼(ILLUSION)>(1997)과 <M.노엘>(1999)을 발표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기에 이른다. 하지만 한혜연은 이 즈음 창간한 ≪나인≫을 통해서 또 다른 갈래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다. 성인 여성들을 주 독자로 하는 여성 만화들이다. <일루젼>과 <M.노엘> 또한 작품 성향상 대상 연령대가 낮은 편은 아니었지만, 순정만화가 아닌 ‘여성 만화 잡지’를 표방하고 나선 ≪나인≫에서의 활동으로 한혜연은 <금지된 사랑>(1999)과 <후루츠 칵테일>(2000) 그리고 <아름다운 마지막 존재(아.마.존)>(2000) 등 한국 페미니즘 만화사를 논할 때 단연 첫 머리 내지는 초반에 오를 만한 작품들을 발표한다.
이렇듯 한혜연은 10대 중심으로 형성돼 온 상업 만화의 중심축에서 일찌감치 벗어나 준 성인층 이상 연령대인 여성들이 읽을 만한 만화들을 꾸준히 그리며 자기 영역을 확장해 왔다. 초기 작품들이 허를 찌르는 상상력으로 반전의 묘미를 살리는 미스터리 장르의 특성을 잘 구축해 냈다면, 여성 만화 잡지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작품들은 일상 속에서 길어 올린 섬세한 언어로 인물 사이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을 깊숙하게 파고 들어가는 이야기로 별달리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도 독자들의 가슴을 거세게 두드린다.
하지만 한혜연 만화를 비단 ‘미스터리’와 ‘크리스마스’ ‘여성 만화’ 세 가지 키워드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만화가 한혜연의 보여 주는 진가란 비단 이들 키워드를 모두 따로 병행할 수 있다는 점만은 아니다.
 
작품을 내어놓는 태도에서 오는 독특함
말 주변이 없다는 자평도 있지만, 한혜연은 핵심이 되는 말 이외엔 거의 바깥에 내어놓지 않는 인터뷰이로서 인터뷰마다 대체로 매우 짧은 답변을 내어놓는 편이다. 질문이 두세 줄 이상이어도 답변은 거의 한 줄 안쪽, 그것도 거의 단답형이다. 이메일 인터뷰 정도가 실제 인터뷰보다는 조금 더 긴 문장을 적고 있으나 그마저도 긴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 짧디짧은 문장은 한편으로 다른 해석의 여지를 만들지 않는다. 한혜연은 의도를 근사하게 꾸며서 설명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본인 작품 속 인물들이 그러하듯 담백하고 담담하게, 오로지 자기 안의 핵심만을 이야기한다.
대체로 한혜연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묻어나는 인터뷰어의 다소 난감해하는 인상은, 이 핵심이 인터뷰어의 기대나 의도와는 살짝 벗어난 지점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하이텔 순정만화사랑 동호회와의 인터뷰에서는 “독자라는 존재를 의식하고 작품하나?” “아무 생각 없다”, “순정만화의 개념은? 본인이 순정 만화가라고 생각하나?” “생각 없다”, “만화 작업이 의미가 있는가?” “의미라기보다는 그냥 그린다”, “납량물 같기도 하고, 환타지 같기도 한데 염두에 두는 장르가 있는가?” “없다”식의 질문과 답이 오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는 만화 비평 웹진≪두고보자≫ 2호의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인 양 나와서 굉장히 특이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왜 그런가요?” “이유가 없어요”, “<토마토 쥬스>(단편집 󰡔후루츠 칵테일󰡕 수록작 <100% 리얼 토마토 쥬스(100% REAL TOMATO JUICE)>를 가리킨다)는 젠더 문제인가요?” “그냥...”.
물론 인터뷰 대상에 따라서는 질문과 완전히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경우도 있지만 한혜연은 방향이 다른 게 아니라 본심의 핵심 이상을 더 말해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이 사람은 정말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구나, 에누리 하나 없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래서 인터뷰나 작가의 말에서 종종 드러나는 세상을 보는 시각들이,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표현되었을 작품 속 장면들이 역설적으로 그냥 튀어 보이려고가 아니라 진짜라는 묘한 신뢰감(?)이 생긴다. 이를테면 󰡔기묘한 생물학󰡕(2010) 수록작인 2006년 코믹무크 1호 ≪밥(BOB)≫ 발표작 <먹이연쇄>의 원고 뒤에 실린 작가의 말에는 친구 모임에서 밥을 먹으며 본 장면들이 기술돼 있다.
“(…) 배가 몹시 고팠던 누군가는 정신없이 밥을 먹었고, 늦은 점심을 든 까닭에 배가 고프지 않았던 누군가는 그렇다고 끼니를 거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천천히 밥을 먹었고, 누군가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을 즐기며 밥을 먹었고, 누군가는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었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직업에 회의를 갖는 친구도 있었고, (…) 나는 밥을 비비는 1분 동안 다른 생명의 시체들을―때로는 시체가 되기 전의 상태로 ― 먹어치우고 그 생명들이 살아 있을 때 저장해 둔 에너지를 흡수하는 행위에 대해 생각했다. 그 외에 무엇을 더 흡수할지 누가 알아. 마감을 앞둔 휴일 저녁에 그렇게 모여 따로국밥이 아닌 비빔밥을 먹었다.”
󰡔후루츠 칵테일󰡕 수록작 중 가게 물건을 훔쳐가지 못하게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28세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단편 <그집... 딸기 빙수>의 경우는 문구점 같은 곳에 갈 때 보는 감시인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다. ≪두고보자≫ 2호와의 인터뷰에서 해당 작품을 어떻게 구성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한혜연은 이렇게 답한다.
“아트박스나 그런 데 가면 감시인이 참 불편하거든요. 특히 내가 큰 쇼핑백을 들었을 때라던가… 괜히 옆에 와서 주섬주섬 하고… 참 불편한 감정을 많이 느꼈는데… 저 사람들의 평소의 삶은 어떨까?”
한혜연의 만화 상당수는 상당 부분 이렇듯 일상 속 지극히 사소한 장면들에서 시작된 사고를 확장한 결과물이다. 여기에 비단 소재만이 아니라 장면에 등장하는 지나가는 풍경 하나 하나도 일상의 인물들이 그냥 그러고 있을 것만 같은 모습이다.
남들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보냈을 일상의 한 조각에서 자기 시선이 닿은 장면을 그냥 지나 보내지 않고 잡아내는 집요한 관찰력이다. 일상을 독특한 시각으로 관찰하는 건 만화가만이 아니라 창작자들 특유의 예민한 세계관 속에서는 아주 특이한 사례는 아니다. 하지만 한혜연 만화를 독특하게 만드는 건 바로 그다음, 관찰한 대상에 상상력을 덧대어 만들고 벼려낸 이야기를 독자에게 드러내는 태도다.
각종 인터뷰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지만 한혜연 만화는 장르나 형태를 불문하고 구구절절 미사여구가 붙는 일이 없다. “이게 주제요, 봐야 할 지점이다”라고 윽박지르는 일 없이, 또 “이놈이 나쁜 놈이니 같이 욕합시다” 하는 일 없이 그저 보여 주고자 하는 이야기를 인물과 함께 내어놓고 배치한다. 대중적으로 친절하지는 않고, 그림마저 비교적 담담한 편이어서 진입장벽을 토로하는 이들도 일부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몰고 들어가는 스토리텔링과 연출 구성이 한층 두드러진다. 장편이 많지 않고 주류 상업 만화의 틀에서도 살짝 비껴난 작품들도 많지만 한혜연이라는 작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마니아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렇듯 한혜연 만화가 지니고 있는 견고한 태도가 주는 독특한 맛이 큰 역할을 한다.
한혜연 만화가 어른 독자들에게 좀 더 어울리는 만화라는 평가는 비단 소재나 표현 때문이 아니라 이런 만화 안쪽의 맛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연륜과 독서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혜연 만화는 그런 점에서 명확하게 ‘보는’이 아닌 ‘읽는’ 만화다. 보는 즐거움을 주는 만화가 낮은 수준이라는 말이 아니라 읽어내는 재미를 주는 쪽에 가깝다는 의미다.
만화란 매체가 화려한 필력과 그래픽의 밀도로만 독자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한다면 그 실례로 언급할 만한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한혜연이다. 그리고 한혜연은 이런 특징을 바탕으로 매우 다양한 이야기를 만화로 보여 왔다. 이 책에서는 바로 이 다양한 이야기의 구분이 비단 앞서의 키워드 셋, 즉 ‘크리스마스 만화’ ‘미스터리 만화’ ‘여성 만화’에 국한하지 않는 점을 한혜연의 만화 활동기를 훑으며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한혜연의 삶과 대표 키워드 셋을 조명하다
이 책의 열 꼭지는 한혜연의 삶과 만화가 인생을 훑어 내려가며 그간 한혜연이 보여 온 활동의 시기별 흐름을 짚어 묶어 내는 형태로 구성하고 있다. 먼저 1장부터 2장까지는 한혜연의 등장을 전후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3장부터 5장까지는 만화가 한혜연을 대표하는 키워드를 조명한다.
먼저 1장 ‘만화가 한혜연의 삶’은 한혜연이라는 만화가가 태어나서 만화가가 되기까지와, 만화가로서 살기 시작한 시점부터의 전체적인 삶을 나누어 만화가 한혜연의 삶을 간략하게 정리한다. 1장은 대체로 만화가 데뷔 전후에 있었던 한혜연 개인의 에피소드들과 데뷔 이후의 비블리오그래피를 가볍게 언급하면서 한혜연이라는 인물 자체에 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곳곳의 언급들을 소개한다. 1장을 통해 한혜연의 활동이 어떤 흐름으로 이어졌는가를 전하며, 이후 장부터 이어지는 세부적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인 지점들을 제공하고 있다.
2장 ‘만화가 한혜연, 데뷔 전후의 토양과 맥락’은 한혜연이 만화가로 데뷔해 활동한 시점을 전후한 시기적 ,시대적 맥락을 짚는다. 한혜연이 데뷔한 1993년은 한국 만화,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순정만화에서 상업 만화 잡지가 대거 등장하던 때이며, 잡지 발행과 더불어 지면을 채울 신인 만화가들도 대거 등장하던 때다. 이 시기의 신인 만화가들은 잡지 공모전에 당선하거나 아마추어 만화 동아리(동인) 활동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는 방식을 띠었다. 특히 여성들을 중심으로 창작되고 읽히는 순정만화는 단지 만화 장르로서만이 아니라 시대 변화에 따라 의식을 달리해 가던 여성들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도구가 되면서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르네상스≫로 시작한 상업 만화 잡지 창간 붐은 한국 만화계 전체로서도 큰 사건이었지만, 그 흐름을 만들어 낸 힘은 1980년대를 가로지르던 여성 만화 창작자들과 독자들의 힘이었다. 1990년대 한국 만화 잡지, 특히 순정만화 잡지의 부흥기는 1980년대의 흐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한혜연 또한 그 흐름 위에서 만화가 활동을 시작한 신진이었으며 만화 잡지의 시기적 맥락 위에서 활동 폭을 넓혀 왔다.
3장은 ‘미스터리 전문 만화가’다. 한혜연의 초중반 활동을 규정하는 키워드는 누가 뭐래도 미스터리다.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멜로와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인간관계라는 데에 매력을 느껴 추리소설 읽기를 좋아했다는 한혜연은 한편으로 일찍이 관심 있던 생물 쪽으로 활동을 이어가다 대학 전공도 생물학으로 하게 됐다. 그래서 한혜연의 만화 표현을 이야기할 때 전공과 연결 짓는 경우가 굉장히 많고, <기묘한 생물학>과 같은 작품을 보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도 보인다. 하지만 과연 생물학적인 지식이 작품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일까? 한혜연과 생물학의 연결 고리에서 ‘전공’이라는 말에 무게를 지나치게 싣고 있는 것은 아닐까? 3장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 관해 조금은 다른 논점을 제공한다.
4장은 ‘한혜연 만화와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은 2016년 ‘GIRLS DO NOT NEED A PRINCE’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인증한 성우가 출연한 게임에서 음성을 삭제당한 이래 대한민국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로 급격히 떠올랐지만 여전히 일방적인 몰이해가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내리누르려는 시도와 이에 따른 반발이 교차하는 상황이다. 한혜연이 미스터리에 이어 1990년대 후반부터 그리기 시작한 만화들은 발표 20년이 되어 가는 지금에도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한혜연은 ≪나인≫의 창간과 함께 순정만화를 넘어 성인 여성들의 감성을 담는 장르로서 ‘여성 만화’를 본격적으로 발표한다. 하지만 한혜연의 만화는 단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해 여성의 공감을 꾀하는 만화로만 볼 수는 없다. 그의 만화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모두 동등함을 말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에 명확하게 닿아 있다.
한혜연은 관계에서 오는 공감과 성을 비롯한 갖가지 욕망 등 여성의 삶과 삶 속 일상, 일상 속에 걸친 화두들을 비교적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성 소수자들을 주인공으로 삼기도 하는데, 섹슈얼 판타지로서의 야오이(やおい, BL)와는 선을 달리하는 한편, 퀴어 장르의 채용이라기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구획과 차이를 설정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건조한 듯, 하지만 사실은 따뜻하고 세심하게 담아낸 점에서 페미니즘의 질감을 한층 더 명확히 한다. 페미니즘에 관한 의도적 오독과 모독이 첨예해질수록 한혜연 만화는 시대를 읽기 위한 텍스트로서 끊임없이 다시 소화될 것이다.
5장은 ‘크리스마스 만화가’다. 크리스마스 때면 으레 새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궁금해질만큼 한혜연의 크리스마스 단편은 이제 만화인들에겐 일종의 연례행사가 되어 가고 있다. 단편집 󰡔그녀들의 크리스마스󰡕와 󰡔어른들의 크리스마스󰡕는 물론 그 이후까지 발표된 크리스마스 단편들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살피는 한편으로 한혜연이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까닭을 소개한다.
 
한혜연 만화 인생을 설명하는 또 다른 말들
6장부터 10장까지는 미스터리, 여성 만화와 페미니즘 그리고 크리스마스라는 3대 키워드 외에 한혜연 만화와 만화 인생을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을 소개한다.
6장은 ‘개그만화가 한혜연?’이다. 제목에 물음표를 찍은 건 그만큼 한혜연을 소개할 때 개그라는 키워드는 굉장히 생소하다는 점을 반영한 표현이다. 실제로 한혜연이 발표한 개그만화는 편수로 보자면 두 편으로 전체에서 비중이 큰 편은 아니고, 그 중 한 편은 단행본이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는 이가 드물다.
하지만 한혜연의 개그만화는 한혜연 만화의 스펙트럼이 넓음을 말하는 사례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나인≫을 전후해 갈리는 한혜연 만화의 두 분기 사이에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 일반적인 연애 개그와는 달리 이전 이후의 한혜연 만화가 지니고 있는 특징들을 상당 부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팬들 사이에서도 상대적으로 덜 평가 받고 있는 작품들이지만 그 나름의 존재 의미를 부각해 보고자 했다.
7장은 ‘한혜연 표 여성 만화의 리얼리티’다. 이 장에서는 <금지된 사랑>과 <후루츠 칵테일>로 본격화한 한혜연 표 여성만화가 특히 여성 독자들에게 큰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리얼리티에서 찾아본다. 한혜연은 세심한 관찰을 통해 일상에서 포착해 낸 여성의 다양한 언어를 묘사해 현실감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지만, 이 장에서는 오로지 묘사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언어에는 말로 이루어진 언어와 행동에서 묻어나는 신체 언어 외에도, 흔히 여성의 언어라고 일컬어지지만 사실은 가부장적인 배제의 언어 바깥에 자리한 모든 언어가 포함된다. 그리고 배제의 반대는 무조건적인 포용과 화해가 아니라 현실에 있는 그대로를 놓아두는 것이다. 한혜연 만화의 리얼리티는 애써 부각하지 않음에서 온다는 점을 7장에서 언급한다.
8장은 ‘리얼리스트 한혜연’이다. 이 장에서는 한혜연 만화가 지니고 있는 리얼리즘 만화로서의 성격을 조명한다. 리얼리즘 만화는 198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타고 민중예술의 한 범주이자 도구로 등장해 시대상과 민중의 아픈 삶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로는 급격한 시대 변화의 조류 속에서 리얼리즘 만화를 대표하던 작품들과 같은 에너지를 만들어 내지 못한 채 필요성이 사실상 사장되다시피 했다고 평가 받는다.
물론 2000년대 후반 들어 다시금 엄혹한 시대가 찾아오며 르포르타주의 형식을 띠고 사회 고발을 하는 무기로 등장했으나,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리얼리즘 만화는 흔히 공백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시대상이 다르고 2000년대의 시대상이 또 다르다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리얼리즘의 옷은 그만큼 달라야 할 것이다. 8장은 바로 이 다른 시대의 리얼리즘을 구축한 작가로, 또 흔히 가려지곤 하지만 1980년대에 분명히 자리했던 리얼리즘 순정만화의 다음을 이어 다시 2000년대로 배턴을 넘긴 작가로서 한혜연에 주목한다. 특히 미스터리 만화와 여성 만화의 지향점이 절묘하게 결합하기 시작한 시점인 2000년대 한혜연 만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리얼리즘의 한 지점들을 발견하는 건 매우 반가운 일이다.
9장은 ‘인터넷 시대의 한혜연’이다. 한혜연은 2000년에 인터넷 연재를 처음으로 진행한 바 있다. 한혜연 본인은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연재하든 개의치 않는 입장이지만, 잡지 지면이 줄고 초기형 인터넷 기반 만화 웹진들이 대거 실패한 이래 포털 웹툰 연재란으로 재편되는 급격한 시장 변화 속에서 한혜연의 만화 활동 또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첫 인터넷 연재 이후 10년만인 2010년 웹툰을 두 편 연재하면서 웹툰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리기도 했지만, 그 사이에 연재지는 대거 사라졌다. 한혜연이 2001년 1년가량 충전을 위해 캐나다에 다녀온 이래 수 년 사이 일부 잡지를 빼면 대체로 판도가 이미 웹으로 바뀌었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출판만화의 맥을 끊지 말자는 절박함이 묻어나는 일종의 대안매체들이 등장하던 상태였다. 9장에서는 단지 인터넷에서 발표한 작품들을 거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 시대 전환기 속에서 한혜연의 작품이 어떤 공간에 어떻게 실리고 어떻게 소개되었는지를 한 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조망해 본다.
마지막으로 10장은 ‘연구자, 교육자 한혜연’ 편이다. 한혜연은 2005년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2011년부터는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 창작 전공에서 본격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장에서는 단지 학위 취득으로만이 아니라 만화와 미술 사조의 영향은 물론 여성 만화가로서 여성 만화의 표현 양식에 관한 고찰에 나섰던 한혜연의 연구를 좇는 한편, 교육자로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지에 관한 내용을 담는다.
이 책은 이 같이 열 개 장에 이르는 내용에서 한혜연의 만화가 인생을 단지 잘 알려진 세 개의 키워드를 넘어 한층 더 다양한 측면으로 조명할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한혜연의 만화 세계가 지닌 담백하고 담담하되 견고하고 집요한 매력과 이들 매력이 자아내는 다층적인 깊이가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