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야기_성 아타나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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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 7, 2020 02:1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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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 속 성인이야기
성 아타나시오
글 /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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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니니 1656-1666 성 베드로 대성당 로마
신경(信經)이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교의(敎義)의 중요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 것으로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작성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사도신경’ 그리고 성 아타니시오의 이름을 딴 ‘성 아타나시오 신경’의 세 가지가 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신경은 이 세 가지이지만 이중 ‘성 아타나시오 신경’은 현재 가톨릭 기도서에는 빠져있어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옛 가톨릭 기도서인 ‘천주 성교 공과’에는 이 신경의 전문이 실려 있어 옛 신자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신경이었다. 그리고 현재 성공회와 루터교의 기도서에도 실려 있다.
‘성 아타나시오 신경’은 그 저자와 저술시기에 대해서는 학자와 교부에 따라 의견이 다른데 어떤 이들은 프와티에의 성 힐라리오를 또 다른 이들은 성 암브로시오를 그 저자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아타나시오 성인께서 특별히 ‘삼위일체’ 교리로 엮은 신앙 조목들이 그 주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점은 틀림없다. 40개 신조로 이루어진 이 신경은 삼위일체 교리를 강조하며 특히 그리스도의 양성을 분명히 주장 고백하고 있다. 9세기부터는 매 주일 성무일도 중에 고백하도록 배려되었고 옛 예식서의 구마경에도 포함되어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삼위일체 대축일 성무일도서에 삽입되어 있다.
알렉산드리아 주교로 아리우스 이단과 맞서
그렇다면 이 신앙고백의 제목에 언급되는 성 아타나시오는 누구인가?성 아타나시우스(그리스어:Αθαν?σιος 293년?~373년 3월2일)는 4세기에 활동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였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성공회로부터 모두 성인으로 존경받는 초대 동방의 4대 교부 중 한분으로 개신교로부터도 위대한 교회의 신학자요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어린 시절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과 신학 교육을 받으며 보냈고 325년 부제 자격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를 수행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했다. 이때 이집트의 신학자 아리우스가 ‘성자’ 예수는 영원한 존재가 아닌 단지 인간일 뿐이고 ‘성부’에게 종속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이 벌어진 현장을 목격하고 참된 정통신앙의 교리 정립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328년 알렉산데르 주교가 사망하자 아타나시오는 논란이 있었지만 젊은 나이에 알렉산드리아 주교직을 계승하게 된다. 아타니시오는 주교가 된 후 이집트와 리비아의 자신의 광범위한 주교구를 직접 찾아다니며 방문하는 데 전념했다. 이 기간 동안 나일강 유역의 콥트 교회 수도사들과 그들의 지도자인 파코미우스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그 때부터 리코포리스의 주교인 멜레티우스와 아리우스주의의 이론을 이단으로 공격하며 평생을 그 투쟁으로 보내게 된다. 이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는 무려 다섯 번이나 주교직을 박탈당하고 망명자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대체로 아리우스의 주장을 받아들였기에 아리우스의 가장 큰 적인 아타나시오를 박해했던 것이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주장이 배척 받았지만 당시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는 아리우스주의가 오히려 더 우세했기에 아리우스파는 335년 그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 박탈을 결의했고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를 티레(오늘날의 레바논)로 추방시켰다. 이것이 그의 다섯 번에 걸친 주교직 박탈과 추방의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단과 싸우며 다섯 번에 걸쳐 주교직 박탈과 추방당해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자 그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다시 복권되었지만 339년 다시금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비롯한 아리우스파는 안티오키아에서 교회회의를 열고 알렉산드리아 주교 자리에 그레고리우스라는 인물을 임명하고 아타나시우스를 해임하고 추방한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는 로마로 가서 교황 율리오 1세의 열열한 지지와 도움을 받고 343년 이탈리아 반도의 주교 50명이 모인 사르디카 교회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알렉산드리아의 유일한 주교로 인정받았다.
또한 당시 서 로마 황제 콘스탄스를 직접 만나 그의 신임을 얻고 345년 아리우스파가 세운 그레고리우스가 죽자 황제 콘스탄스의 비호 아래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복권되었다 이때 콘스탄스는 형인 콘스탄티우스 2세와의 일전을 불사하며 아타나시오를 옹호하였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굴욕적으로 아타나시오를 복귀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로인해 아타나시오는 위대한 개선장군처럼 알렉산드리아로 다시금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350년 아타나시우스의 옹호자였던 서로마 황제 콘스탄스가 죽자 다시 상황은 아리우스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와 아리우스파는 다시 아타나시오를 제거하기위해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이집트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그를 제거하기는 쉽지 않았고 급기야 356년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아타나시오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성 테오나시오 교회를 급습하고 수많은 신자들을 죽이는 유혈사태까지 발생시켰다. 아타나시오는 거의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이집트의 사막에 있는 수도사들에게로 피신했다. 이후 약 6년간 계속된 도피는 박해자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고 율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하자 끝났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오자마자 율리아누스 황제는 362년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추방하였다. 그후 율리아누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와 싸우다가 전사하고 발렌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자 아타나시오는 다시 복권되었는데 그것도 잠시 아리우스파였던 발렌스 황제는 365년 아타나시오를 다시 추방하였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키자 황제는 결국 아타나시오를 366년에 약 4개월 만에 다시 복권시켰다. 그후 아타나시오는 373년 5월2일 78세의 고령으로 죽기까지 알렉산드리아에서 주교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신약성경 27권 목록 처음으로 만들어
이렇게 아타나시우스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정통신앙을 수호하고자 했는데 그의 수많은 업적 중 또 하나는 오늘날까지 전 세계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약성서 27권의 목록을 처음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여러 차례의 박해와 망명에서 벗어나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주교직에 복귀한 직후인 367년 부활절에 자신의 교구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그때까지는 오늘과 같은 신약성서로 정해진 성서가 없었고 수많은 복음서와 바울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편지가 교우들에게 성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외경적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책들을 가지고 와서 그럴듯하게 주장하며 하느님의 영감을 받는 성서와 혼동시키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들에게 하느님의 것으로 고백되고 우리들에게 전승되어 온 정경(the cannon)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책들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만든 27권 목록은 374년 당시 교황 다마소 1세의 주도로 열린 로마 시노드에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인용되었고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받아들여져 공포되었다. 이후로도 아타나시오 주교가 주장한 신약성서 27권의 목록은 그의 주장대로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확립되어 오늘날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