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던 바로 그, <기쿠지로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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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겨울, 코로나가 아직 머나먼 외국 뉴스에서 들리던 때, 호기롭게 떠난 베트남 호치민의 첫 기억은 참 더웠다. 슬리핑 버스에서의 선잠이 불편했는지, 이전 경유지였던 하노이에서 도둑맞은 휴대전화가 손에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불쾌지수도 덩달아 높았다. 호치민의 유명하다는 여기저기를 가 보아도 온통 한국인으로 가득했다. 이럴거면 굳이 여행을 왜 왔나? 쌀국수는 포메인에도 있는데 말이지.
체력 좋은 친구는 호치민 시내를 구경하러 떠났고, 다른 친구는 숙소에서 쉬는 중이었다. 나간다는 말도 안 남기고 잠깐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어딘가로 갈 방법이 없다. 이미 베트남은 그랩(우버와 비슷한 앱)의 천국이었다. 휴대전화가 없는 나는 원하는 장소를 설명할 방법도, 그보다 베트남어로 대화 없이 택시를 탈 방법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했다. 더 이상 한국인을 만나고 싶지는 않아 어제 봤던 시청을 등지고 반대쪽으로 설렁설렁 걷기 시작했다. 양산 역할을 하는 큰 부채 하나를 들고서.
사람 숫자가 줄어들더니 한산한 도로가 나타났다. 깨끗하고 곧은 2차선 도로 듬성듬성 심어진 가로수 밑에 가야 뜨거운 정수리를 잠깐 식힐 수 있을 정도로 별 게 없는 도로였다. 택시들이 속도를 줄이고 탈거냐는 시늉 외에는 무엇도 방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걸었다. 뭔가가 나올 때 까지, 아니면 내가 신경 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 까지 계속 걸었다.
인도 오른쪽으로 반쯤 녹슨 울타리들이 이어졌다. 그 너머로는 규모가 꽤 큰 공원이 펼쳐졌다. 더위도 피해야겠다 싶어 입구를 찾았다. 진짜로 받는 건지 알 수 없는 입장료 몇 천 동을 내고 공원에 들어갔다.
공원은 분명 여행객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듬성듬성 자라는 잡초, 가끔 패여 있는 땅, 난닝구만 입고 벤치에 앉아서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만 보였다. 하지만 그 공원에서 나는 지나가는 주인 없는 개에게 나무 그늘 아래에서 5분 넘도록 부채질을 해야 했으며, 그 대가로 벌렁 누운 들개의 배를 긁는 호사를 누렸고, 미지근한 물을 건네는 장바구니 아주머니에게 고마움을 전하려고 가던 길도 붙잡고 인사말을 떠올리는 무례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제기 비슷한 물건으로 신기한 족구를 하던 조기족구회 회원들께 초대받아 신기한 베트남 족구의 세계에서 깍두기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가장 결정적으로 공원의 반대쪽 입구에는 입장료를 받는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
공원 입구 앞 구멍가게처럼 보이는 곳에서 물을 하나 더 샀다. 그리고 공원 입구의 가장 가까운 벤치에 앉아 모자란 물을 마셨다. 그 순간 내가 공원에서 만났던 모든 순간이 한 장면에 들어왔다. 아주머니, 난닝구, 어린이, 개, 매미소리, 아저씨, 공원의 나무. 입장료 내고 남은 2천동에 물 사고 남은 5천동 합이 7천동.
바로 그 때, 나는 휴대전화가 있다면 히사이시 조의 Summer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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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본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오랜만에 호치민에서 경험한 여름을 다시 느꼈다. 역시 여행은 해 볼 만하다. 과정이 복잡하고 결말을 알 수 없다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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