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해, 네겐 24시간 열려 있어”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토요판] 김선희의 학교 공감일기 ③ 잠들지 못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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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연료로 돌아가는 우리 사회의 공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이미 무언가를 이룬 어른들에 비해 더 높은 불안에 시달릴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불안을 연료로 돌아가는 우리 사회의 공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이미 무언가를 이룬 어른들에 비해 더 높은 불안에 시달릴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고등학교 1학년 승애(가명)의 담임이 된 그해 봄, 우리 반은 유난히도 성취욕이 높았다.
“김선희 선생님, 올해 계 탔네요. 아이들이 얼마나 학습의욕이 높은지 수업시간 내내 눈이 반짝반짝 빛나요.” 수업에 들어가는 여러 선생님들이 몰입도 높은 수업 분위기에 만족하면서도 부러운 듯 말씀하셨다.
4월이 되어 첫 지필고사 일정이 발표되자 아이들의 공부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그런데 시험 며칠 전부터 유독 승애의 낯빛이 어둡고 눈은 충혈되어갔다. “승애야, 너 요즘 잠을 잘 못 자니?” “시험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잠을 자요? 남들 자는 만큼 다 자고 어떻게 대학을 가겠어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넌 이해력도 좋고 누구보다 수업에 열중하고 있으니 그날그날 복습만 잘해도 성과가 좋지 않을까?” “안 그래도 엄마가 자꾸만 자라고 간섭하세요. 사촌들이 다 특목고에 가서 무척 부러우셨을 텐데, 엄마는 단 한번도 내색하지 않으셨어요. 일반고에 왔으니 내신 관리 잘해서 명문대 가는 것으로 효도하고 싶어요.” 아이의 마음은 간절했다.
그날부터 며칠간 밤늦은 시간에 종종 시험이나 입시 관련 질문 문자가 왔다. 명석하고 예의 바른 승애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문자를 보내니 과도한 불안에 시달린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첫날 시험을 잘 보지 못하고 주말을 맞이한 아이의 불안은 일요일 새벽에 절정을 이루었다. 새벽 4시에 문득 잠에서 깼는데 기나긴 문자가 온 것이다. 사죄의 내용이 전체의 반을 차지하면서도 끝내 보낸 걸 보니 홀로 지옥 속을 걷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순간 아이의 고통에 이입하여 나 또한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상황에 놓인 아이의 마음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첫날 시험을 망친 건 어머니 조언 안 듣고 몇날 며칠 잠을 미뤘다가 집중력이 흐려진 탓이라며 자책했다. 남은 기간이라도 잠을 자보려고 했지만 이미 망친 시험 점수를 남은 과목에서 만회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에 도저히 잠이 오질 않고, 깨어 있어도 심한 두통으로 공부가 안된다고 했다. 그러더니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이제 그만 모든 걸 포기해야 할까요?” 하며 울먹였다. 순간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그 어떤 충고와 조언도 줄세우기 무한경쟁 사회의 분위기에 압도된 아이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승애야, 이 시간까지 잠도 못 들고 공부도 안되니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니? 이런 상황을 이렇게 솔직하게 알려주어 고맙다. 앞으로도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샘의 전화가 너에게만큼은 24시간 열려 있을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승애는 “정말 감사합니다. 왠지 선생님만큼은 저를 탓하지 않을 거 같았어요. 이젠 좀 안심이 돼요. 그만 자봐야겠어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승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공감하는 순간 이입되었던 나의 불안도 해소되었다.
그날 이후 승애는 단 한번도 방과 후나 휴일에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지 않았다. 대신 가끔 교무실에 찾아와 내 형편을 물으며 정중하게 상담을 요청하곤 했다. 주로 불안을 호소하기보다는 자신의 학업 계획이나 포부를 밝히며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나의 관심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1년 내내 지칠 줄 모르는 활력을 보이며 탄력적이고 의욕적인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 없는 공감의 힘을 깨닫기 전이었다면 자칫 버릇없는 아이가 될까 봐 끝내 아무 때나 연락하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럴싸한 조언을 했을지도 모른다. 위기를 감지한 내가 아이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묻고, ‘너에겐 24시간 열려 있어’라고 말하자 일순간에 아이가 안정감을 되찾았다. 공감이 어떤 충고나 조언과도 맞바꿀 수 없는 정확한 처방이었음을 나는 깨달았다.
불안을 연료로 돌아가는 우리 사회의 공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이미 무언가를 이룬 어른들에 비해 더 높은 불안에 시달릴 수 있다. 절대빈곤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살아온 부모 세대의 불안이 더 나은 세상으로 가고자 하는 우리 세대의 발목을 잡아 그대로 아이들에게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문득 재난 영화에서 살아남은 주인공이 허공을 향해 본능적으로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거기 누구 없어요?” 누구나 가장 극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듯, 누군가 함께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희망으로 가는 마음의 탈출구는 활짝 열릴 수 있다.
▶김선희 교사. 경기도 내 중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25년차 교사이자, 가정과 학교에서 미래의 주역들과 함께 성장해가는 삐뚤빼뚤 민주주의자다. 단 한 존재도 학교에서 입시 성적으로 매겨진 등급과 서열로 인해 함부로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 당하지 않는 세상을 기도하며 따뜻한 공감의 시선을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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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