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만화유산 답사기 (2018, 생각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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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만화유산 답사기 - 만화 문화와 얽힌 시공간을 찾아서》
생각비행 발행
2018.03.01
432쪽
576g
140×200×30mm
ISBN 9791187708735
 

책 뒷이야기

 
《키워드 오덕학》에 이은 두 번째 단독저서. 일찍이 나는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 앞에 있는 고 아르망 페르난데스의 조형물 <수백만 마일>이 차축 999개를 쌓아 올려 터미널 앞 미술관이라는 장소의 의미와 무한함과 영원성이라는 주제를 표현한 데에 큰 감명을 받았다. 특히 999란 숫자를 본 순간 이건 <은하철도 999>와 엮어 설명할 만하다는 생각에 <만화 밖 만화>라는 꼭지를 준비했었다. 그 꼭지가 수 년 만에 다소 성격을 달리 한 것이 《나의 만화유산 답사기》다. 만화와 얽혔던 장소가 끌어안은 역사적 흔적과 그 속에서 만화가 어떻게 자리했는가를 살피는 글로, 연재 당시에 글과는 상관 없는 트집으로 일관하던 대표 덕에 묻힐 뻔하던 것을 책으로 완성해 내놓은 것이다. 제목은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따온 것인데, 패러디 제목은 해당 책이 너무 강력해도 검색에서 다소 손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역시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있는 서울 남산이 문화 공간으로 재정립된 과정을 살핀 원고와 한국의 자생 오타쿠 1세대를 20세기 말에 환생한 모던보이와 모던걸로 규정한 명동 삼국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뻤던 책이다. 만화 작품을 텍스트로 삼기 보다 만화라는 문화를 미시적으로 파헤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목표만큼은 여전히 꽤 유효한 방법이라고 생각은 들지만 결과는 다소 아쉬운 편이었다. 다만 이 책을 낸 이후 만화 작품 속 배경지를 찾아다니는 <만화 속 배경 여행> 콘텐트를 기획하게 되었고 여행잡지 연재에 이어 지원사업 선정으로 영상화에 성공, 방송사 송출까지 해 보았으니 - 여러 가지를 가능케 한 시작점으로서는 큰 의미가 있다.
 

차례

 
들어가며 |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배태하는 시공간을 누비다
 
01 치욕과 공포의 흔적을 안아든 문화 공간―SBA 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남산 일대 남산, 신성한 산에서 일제 침략의 근거지로 | 남산, 일제의 근거지에서 독재의 근거지로 | ‘안기부 터’가 된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건물 외벽에 박정희의 글씨가 있는 이유 |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출범 | ‘산업’ 기조만 강조 말고 조금 더 문화적, 역사적 공간으로 쓰이기를 ◆장소 옆 이야기 재미로와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변화 중 | 남산 돈까스 | 남산인권마루와 기억의 터 | 공포 만화 거장 이토 준지의 망언 ◆답사 코스 통감관저 터 ― 중앙정보부 ― 안기부 | 서울애니메이션센터 ― 남산원 ― 숭의여자대학교 | 서울애니메이션센터 ― 재미로, 재미랑 ― 명동역
 
02 아마추어 만화인과 코스튬플레이어의 각별한 추억이 서린 곳―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여의도 종합전시장(SYEX) 여의도 개발과 종합안보전시장 | 중소기업 여의도 종합전시장의 등장 | 뛰어난 접근성, 매력적인 임대료로 만화 행사들을 끌어들이다 | 굼벵이관이 아마추어 만화인과 코스튬플레이어에게 각별했던 이유 | 사라진 장소가 남긴 여파 ◆장소 옆 이야기 5.16 광장에서 여의도 광장, 다시 여의도 공원으로 | 굼벵이는 어디로 | 이명박과 박근혜 | 사라져간 ACA | 컬처 쇼크 & 카타르시스 ◆답사 코스 IFC | 여의도 공원 | SETEC, aT센터
 
03 만화에 서린 또 다른 독재의 흔적―신촌 일대, 그리고 신촌 대통령 합동 출현 직전 ― 1. 단행본 시장에서 대본 중심 시장으로 | 합동 출현 직전 ― 2. 독재 정권 뒤의 독재 정권, 불량만화 논쟁 | 1967년, 합동의 등장과 전횡 | 반反합동 움직임 전개와 야합, 그리고 좌절 | 합동의 끝없는 전횡, 그리고 종말 | 독재자의 치세는 끝났으나 ◆장소 옆 이야기 이한열과 신촌 | 한국 만화 데이터베이스의 시발지, 신촌 ◆답사 코스 합동출판사의 자취를 찾아 | 이한열을 기억하는 길
 
04 둘리의 고향, 소시민의 발자취를 찾아―한강에서 쌍문동까지 둘리는 어떻게 고길동의 집 앞까지 오게 됐을까? | 둘리, 강북의 아이 | 〈아기공룡 둘리〉,〈 응답하라 1988〉의 모티브가 되다 | 도봉구의 둘리 사업, 기대와 아쉬움 | 우이천의 둘리 벽화 ◆장소 옆 이야기 쌍문동을 무대로 삼은 또 다른 작품 | 새 애니메이션에서는 둘리가 부딪친 한강 다리가 다르다? | 도봉구, 만화가 전용 주택 조성 ◆답사 코스 둘리뮤지엄 | 쌍문1동 주민센터, 숭미파출소 | 둘리 벽화 | 길동 씨네 앞
 
05 덕내와 젊음이 자리했던 어느 이공간에 관하여―홍대 일대 홍대 권역에 관한 추억 | ‘홍대 문화’의 시작과 발달 | 일본풍, 그리고 오덕 문화와의 만남 | 젠트리피케이션, 홍대 앞은 더 이상 성지가 아니다 ◆장소 옆 이야기 손희준 작가의 홍대 추억 | 새로운 덕질 공간, ‘홍대 던전’ ◆답사 코스 한양TOONK, 북새통문고 | 한 잔의 룰루랄라 | 홍대 던전
 
06 복숭아 마을, 만화 도시를 자처하다―부천 복숭아가 유명하던 마을 | 부천의 도시화 | 부천, 만화를 잡은 이유 | 만화만이 주인공은 아니지만, ‘부천〓만화 도시’가 무색하지 않은 까닭 | ‘의미 있는 시도’와 ‘유지’를 넘어서야 할 때 ◆장소 옆 이야기 복사골 문화센터 | 서울 지하철 7호선 | 아파트 벽화 | 웹툰융합센터 ◆답사 코스 부천시립북부도서관 | 부천종합운동장 | 둘리의 거리, 복사골문화센터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07 한국 근대만화의 시작지―《대한민보》 터 1909년 6월 2일이 한국 만화의 시작일인 까닭 | 관재 이도영貫齋 李道榮 | 그리고 《대한민보》 | 수진궁 터를 한국 만화의 시발지로 기념한다는 것 ◆장소 옆 이야기 만화의 날을 6월 2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관하여 | 한국과 일본은 만화의 날이 같다? | 수진궁 귀신, 그리고 제안대군 ◆답사 코스 《대한민보》 터 | 식객촌 | 탑골공원
 
08 책과 청춘의 한 페이지들이 모여 흐르던 곳―청계천과 대학천 대학천의 유래 | 서점이 청계천-대학천에 모여든 연유 | 청계천변에서 살 수 있었던 것들 | ‘대학천’ 표 덤핑 도서와 만화 불량 시비 | 한계 끝에 호황도 끝나다 | 그리고 대학천 거리의 만화 서점들은 지금 | 시대 흐름의 풍파 뒤에 남아 ◆장소 옆 이야기 아내가 대학천 상가에서 겪은 일 | 현대시티아울렛 동대문점 | 세운상가 | 세운상가와 충무로 인쇄골목과 만화가 ◆답사 코스 청계천 헌책방 거리 + 대학천 상가 | 세운상가 | 충무로 인쇄골목
 
09 명동 삼국지와 한국형 오타쿠 여명기의 흔적―명동 중국 대사관과 회현지하상가 진고개, 본정 | 모던보이와 모던걸 | 명동 입구, 중국과 얽히기도 했던 자리 | 조선은행 앞 광장과 미쓰코시 백화점 | 전쟁광 일본 군부의 득세와 폭주, 문화 암흑기 | 미쓰코시 백화점 자리의 미8군 PX화 | 딸라 골목, 외국 서적 골목 | 명동, 한국형 오타쿠 1세대의 양식을 제공하다 | 한국의 오타쿠, 반백 년 만에 환생한 모던보이와 모던걸 ◆장소 옆 이야기 만문만화 | 일신서적과 현대전자 | 메이드 카페 | 부산 보수동 책방 골목과 남포동 일대 ◆답사 코스 중국 대사관 골목 | 한국은행 앞 교차로 | 회현지하상가
 
10 《보물섬》의 자취를 찾아―육영재단과 어린이회관 《보물섬》, 1980년대 만화계 변화의 대표 주자 | 박정희 일가와 육영재단, 그리고 《어깨동무》 | 《어깨동무》와 《보물섬》의 거처, 어린이회관의 터 잡기 | 능동에 어린이대공원이 들어선 사연 | 육영재단의 본체, 능동 어린이회관 | 《보물섬》 창간 과정에 비릿한 냄새가 나는 까닭 ◆장소 옆 이야기 《보물섬》 창간호(1982년 10월호)에 실린 박근혜 창간사 | 박조건축 | 육영재단의 내홍 | 새 보물섬은 학습만화 잡지 | 잼 프로젝트 첫 내한공연 ◆답사 코스 능동 어린이대공원 |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 세종대 | 세종대-건국대 앞 상업시설 + 코믹갤러리
마무리하며 참고 문헌
 

출판사 책 소개

 
“시대적, 장소적, 역사적 배경 위에서 살아 숨 쉬는 우리의 만화 문화”
《키워드 오덕학》(2017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작)으로 자생형 한국산 2세대 오덕의 현재 기록을 정리했던 저자가 《나의 만화유산 답사기》를 펴냈다. 이 책은 만화와 얽힌 장소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 장소가 지닌 공간적 맥락과 역사가 만화와 어떻게 엮이는가를 찾고자 하는 탐구의 글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곳 가운데에는 흔적마저 사라진 곳도 있고 가까스로 버티는 곳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공간을 살던 사람들이 마셨던 공기를 그 자리에 서서 느껴보며 그 자리의 변화와 시간적 역사적 맥락을 떠올려보는 일이다. 모든 답사는 결국 그 지점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답사’라는 말을 빌렸지만, 이전과 지금의 맥락을 살피며 재해석하고 조립하는 일은 그저 그땐 그랬다고 웃으며 넘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유·무형의 에너지로 삼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같은 추억을 향유하는 이들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만화 문화와 얽힌 시공간을 찾아서”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인 N서울타워는 ‘남산타워’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남산 일대는 만화 전시와 애니메이션 영화제 등이 열리는 장소이자 만화계 양대 단체인 한국만화가협회와 우리만화연대가 입주해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서울시 안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과 관련한 공공시설로 손에 꼽히는 공간인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과거 한국통감부와 조선총독부가 있던 자리에 서 있다. 아이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제공하는 곳이 사실은 남산에 서린 치욕과 억압을 고스란히 감내한 공간에 들어서 있는 셈이다.
한편 이곳은 한국전쟁 중에 정동 청사가 폭파돼 임시 방송 체제를 유지하던 KBS(중앙방송국)가 1957년 사옥을 지어 올린 공간이기도 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옛 한국통감부 통감관저 자리 옆에 중앙정보부 본관을 세운다. 나라를 망하게 하고 백성을 엄혹한 식민통치로 몰아넣은 경술국치의 장소 바로 옆에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해 납치, 고문, 용공 및 간첩 조작, 도청 등 온갖 폭압적 수단을 동원하는 기관을 세운 점은 박정희 군사 독재의 의식적, 역사적 맥락이 일제강점기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처럼 저자는 《나의 만화유산 답사기》를 쓰면서 만화사(漫畵史)를 앞세우지 않고 우리의 만화 문화가 어떤 시대적, 장소적 맥락 위에 서 있는가를 이야기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책에는 만화 이야기 이상으로 시대 배경과 근현대사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완전히 별개인 듯한 사안들이 절묘한 타이밍에 만화 이야기 안으로 엮여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아기공룡 둘리를 기억하는 방식”
만화는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1983년 만화 잡지 《보물섬》에 연재된 만화 〈아기공룡 둘리〉의 주인공인 둘리는 지금까지 사랑받는 캐릭터다. 1987년과 1988년 KBS에서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방영되면서 둘리는 그야말로 국민 캐릭터의 반열에 올랐다. 부천시는 1998년 부천만화정보센터를 설립하며 문화적 기조의 중심축으로 만화를 내세웠다.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 캐릭터인 둘리의 상징성을 빌리기 위해 부천시는 2003년에 둘리를 명예시민으로 선정해 명예주민등록증(830422-1185600)을 발급하고 관내에 둘리의 거리를 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캐릭터 조형물과 간판 이상의 것을 만들 여력을 남기지 못했다. 원래 송내로데오거리라는 상권이 자리했던 곳에 둘리 캐릭터를 억지로 붙인 결과기도 하겠으나 만화에도 거리에도 서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반면 서울 도봉구는 ‘둘리의 고향’을 자처하면서 명예가족관계등록부에 둘리의 주소지를 ‘쌍문동 2-2’로 지정했다. 아울러 도봉구는 둘리를 주인공으로 삼아 도시 문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둘리뮤지엄을 개관하고, 둘리가 빙하를 타고 도착한 옛 김수정 작가의 집이 있던 현 쌍문 래미안 아파트 근처 우이천변 벽면(쌍한교-수유교 사이)에 둘리 벽화를 조성했다. 최근에는 지하철 쌍문역을 둘리 테마역사로 개편하기도 했다. 둘리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는 부천시에 비하면 도봉구는 둘리라는 캐릭터를 일상 속으로 잘 소개하고 있는 편이다. 그렇지만 도봉구의 둘리 사업 역시 쌍문동이라는 지역과 둘리뮤지엄, 우이천변이라는 공간성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을 부여하고 있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다.
이런 지점에서 《나의 만화유산 답사기》의 저자는 만화란 창작자의 기상천외한 상상력에서만이 아니라 시대적, 장소적, 역사적 배경 위에서 태어나는 문화이기도 함을 강조한다. 만화 업계인들이나 충실한 독자층에게만 의미가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만화를 모르는 사람들이 접했을 때도 ‘아, 이게 만화와 관련이 있었구나’ 하고 알 수 있는 기록으로 남기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책에 나온 답사 코스는 걷기를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부천 지역을 제외하면 모두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느긋한 마음으로 이 땅의 만화 유산을 답사하며 시대적, 장소적, 역사적 배경을 음미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책에 담겨 있다.
 

서문

 
초등학교 5학년 말 경 나는 충청남도 천안으로 이사했다. 지금에 비하면 당시의 천안도 참 작은 마을이었지만 당시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작디작은 리 단위 마을에서 막 이사를 온 입장이었다. 새로 살게 된 마을을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유난히 꽂힌 게 있었으니, 바로 종합터미널 건물 앞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조형물이었다. 이름 하여 「수백만 마일 – 머나먼 여정(Millions of Miles – Distant Voyage)」. 아르망 페르난데스(Armand Fernandez)가 폐 자동차 뒤축을 가로 세로 6m 높이 20m로 쌓아 만든 이 조형물은 처음 보았을 때엔 묵직하고 거대한 형상으로, 조금 더 머리가 굵고 나서는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로 내 가슴을 거세게 울렸다.
지금도 천안의 종합터미널 앞 광장에서 만나볼 수 있는 「수백만 마일」은 폐 자동차 뒤축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터미널이라는 공간에 부합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건 1000개가 아닌 ‘999’개를 쌓아 올렸다는 점이다. 1000이 아닌 999란 숫자를 선택함으로써 완성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행되어 나갈 무한함을 함축해 표현한 이 작품은 어느 시기부터인가 이미 정신 차리고 보니 오덕이었던 내 가슴을 장대하게 울리기에 충분했다. 이건 그야말로 「은하철도 999」가 말하고 싶어 하는 진정한 영원성과도 닿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만화 관련 글을 쓰기 시작한 시점부터 꼭 이 「수백만 마일」과 같이 만화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뭔가가 만화 작품과 연결되는 사례들을 찾아다니며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만화 밖 만화」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문제는 딱 「수백만 마일」까지만 쓸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만화 작품과 연결점이 있는 만화 바깥의 무언가라는 주제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웠던 탓이겠으나, 도무지 다음 주제를 찾아낼 수 없었던 나는 이 글 꼭지를 언젠가 갚아야 할 빚으로 삼아 마음 한 구석에 밀어 넣어 두었다.
이 『나의 만화유산 답사기』는 「만화 밖 만화」 이후 15년 만인가에 다시 꺼내든 내 마음의 빚더미다. 글의 방향은 특정 만화 작품과의 연결점이 아니라 만화 문화와 얽힌 장소와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쪽으로 바뀌었다. 쓸 수 있을만한 글 꼭지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도 있지만, 그동안 내가 오로지 ‘만화계’ 안쪽에서만 유효한 이야기를 주로 써 온 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방향 변경에 한 몫 했다.
이 주제를 고를 때 들었던 건 만화 업계인들이나 충실한 독자층에게만 의미가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만화를 모르던 사람들이 접했을 때 아, 이게 만화와도 관련이 있었구나 알 수 있는 기록을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만화란 창작자의 기상천외한 상상력에서만이 아니라 엄연히 시대적 장소적 역사적 배경 위에서 태어나는 문화이기도 함을 말하고 싶었던 마음도 컸다. 마침 내가 ‘만화는 시대를 담는다’는 주제를 의뢰 받아 진행했던 몇몇 강연과 전시들도 이와 같은 결정에 도움을 줬다.
그 때와 다른 게 있다면 만화와 시대라는 화두에서 시대에 방점을 찍었다는 점이다. 이번 책을 쓰면서 어떤 경우에도 만화사를 앞세우지 않고 우리의 만화 문화가 어떤 시대적 장소적 맥락 위에 서 있는가를 이야기하려고 했다. 자연히 이 책에는 만화 이야기 이상으로 시대 배경과 근현대사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완전히 별개인 듯한 사안들이 절묘한 타이밍에 만화 이야기 안으로 엮여 들어오는 구석들을 보면서 색다른 재미를 느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느 한 시절엔가는 만화를 접했을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아 이게 만화에서는 이런 곳이었구나 생각해줄 수 있어도 좋겠고, 한 번쯤 직접 찾아가 보시는 분이 계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책의 제목은 더 설명이 필요 없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어감을 슬쩍 빌려 왔다. 처음 이 글을 구상했을 때부터 저 제목 말고는 어떠한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유홍준 선생께 자리를 빌려 고개 숙여 경의와 죄송한 마음을 표한다. 그리고 처음 생각과는 방향이 다소 달라졌지만 가장 중요한 영감을 불어넣어준 『수백만 마일』 의 작가 고 아르망 페르난데스 선생에게도 감사한다. 『수백만 마일』이 없었다면 난 이 글들을 시작하지 못했다.
또한 누구보다도 감사해야 할 분들이 많다. 내 첫 책 『키워드 오덕학』 만큼이나 차마 말 못할 곡절이 쌓인 이 글들을 끝내 세상에 묶어낼 수 있게끔 결정해 준 출판사 생각비행과 담당자 손성실 님, 못 미더운 아들을 묵묵히 지켜봐 주신 양가 부모님, 그리고 역시 첫 책 이후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역시나 전폭적인 응원을 아끼지 않은 아내와 책이 나올 즈음 두 돌이 막 지났을 딸 봄이. 모두 고맙고 사랑합니다.
 
달빛 비치는 2017년 겨울 초엽에 서찬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