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엉터리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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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신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의 성막과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 예배에 대한 상세한 교훈을 알려 주셨다. 거기에는 예배 의식의 중심이 되는 성소와 짐승의 제물과 제사장직과 그리고 주의 깊게 명시된 규례들이 있었다. 이처럼 구약시대의 예배 의식은 매우 정교했다.
신약의 교회 시대에는 구약시대와는 달리 예배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신약의 예배 의식은 매우 단순하다. 즉,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시고 명령하신 대로 신자들이 함께 모여 주님을 기념하며 '떡을 떼는 것' 곧 '주의 만찬'이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 20:7)." 이 말씀과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마다 예수님을 기념하며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다.
이 '주의 만찬' 예배는 하늘로서 재차 사도바울에게도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령하신 기념 예식이다(고전 11:23). 그리하여 초기 교회 신자들은 이러한 '주의 만찬' 예배를 통하여 예수님의 고귀한 죽음을 기념하며 경배를 드렸다. 바로 이 경배를 드리는 것이 예배이며, 이 주의 만찬이 신약 지역 교회의 '공중 예배'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령하시고, 또 성경에 나타나 있는 대로 주일마다 '주의 만찬' 예배를 행하였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천주교의 미사와 개신교의 주일예배 및 각종 예배'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비성경적인 엉터리 예배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천주교의 미사와 개신교의 예배는 성경에 나오지 않으며, 인간들이 고안해 내어 만든 가짜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천주교의 미사와 개신교의 주일예배 및 각종 예배'가 왜 엉터리 예배인가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천주교의 미사와 이와 관련된 성체성사와 화체설이 무엇이며 이에 대한 여러 문제점 등을 살펴보자. 또한 전직 가톨릭 사제들의 미사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그 후 개신교의 예배와 국내 개신교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먼저 미사의 '정의'에 대해 알아보자.
(1) 사전에서 미사는 가톨릭교회에서 거행하는 최대의 예배 의식. 천주를 찬미하고 속죄를 원하며, 다시 은총을 기원하는 것으로,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본떠서 함. 성제(聖祭).
(2) 천주교 용어집에서 미사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말하며, 미사(Missa)라는 라틴말을 음역한 것이다. 이 미사는 가톨릭의 가장 성대하고 엄숙하며, 거룩하고 존엄한 고유의 의식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리는 의식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성서)을 듣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하며 성찬을 나눈다(<천주교 용어집>, 최형락, 성신출판사, 104쪽).
(3) 가톨릭 신자 생활 안내서인 <생활 교리> 책에서 미사는 교회가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께 드리는 참제사이며 성체를 나누는 성찬이다. 성체성사는 항상 미사 중에 이루어진다(<생활교리>, 김경식, 대건인쇄출판사, 219쪽).
상술한 바와 같이 미사는 제사를 말한다. 가톨릭교회의 7성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사인 '성체성사'를 위해서 미사는 필수다. 여기서 성체성사란 영성체라고도 하며 미사 중에 '화체(化體)'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재연된다.
가톨릭 교리에서 영성체(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입에 넣는 의식으로서, 미사 때마다 사제가 손으로 떡 조각을 신자들의 입에 넣어 주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영성체를 모신다'고 말하며, 이것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고 고백한다. 영성체는 신부가 직접 입에 넣어 주기도 하고, 신자가 손으로 받아서 자신이 입에 넣기도 한다. 그리고 사제가 미사 중에 '빵과 포도주'를 성별하면 이들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믿는데, 이것을 소위 '화체설(化體說)'이라고 한다.
모든 가톨릭 교구에서는 매일 미사(제사)를 드리며, 매일 또는 일주일에 여러 차례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도 많다. 가톨릭 교리서에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몸과 죄 사함을 위해 쏟으신 피로 성체에 함께하신다고 쓰여 있다. 즉 성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재연하며, 그분의 위대하신 희생이 재연됨으로써 가톨릭 신자들이 거기 참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상기에 언급한 '화체설(化體說)'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화체설은 예수님이 손에 빵과 포도주를 가지시고 "이것은 나의 몸이고 이것은 나의 피"’라고 말씀했는데, 가톨릭에서는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취해 화체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화체설은 9세기에 라드벌투스(Radbertus)가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059년 교회의 신앙으로 선포되어,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에서 결의하였으며, 1551년 트렌트 공의회에서 선포되었다(<가톨릭교회교리서 비평>, 조영엽, 기독교문서선교회, 177쪽).
사제가 미사 중에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써 빵이 그리스도의 실체로 변하고,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의 실체로 변화된다는 화체설은 비성경적이다.
그럼 이러한 미사 중의 화체설과 성체성사가 왜 비성경적인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자.
(1) 가톨릭에서 미사는 매번 그리스도가 또다시 피 흘림 없는 제단에서 희생당하고 기념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라고 쓰여 있다.
(2) 가톨릭은 미사를 드릴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제단 위에서 다시 희생당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6)"고 쓰여 있다.
(3) 가톨릭에서 미사 중에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로 변화한다고 주장하면, 신자들은 포도주인 피를 마시는 셈이다. 그러나 성경에 하나님은 피를 마시는 것을 금하셨고,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시는 하나님이라고 쓰여 있다(레 17:10, 행 15:20).
(4)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는 동시에 우리가 전에 지은 죄를 정화하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준다(1393조)." 또한 "성체성사는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미래의 죽을죄에서 보호한다(1395조)." 그러나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고 쓰여 있다(요일 1:7).
(5)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성찬례의 제사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지만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는 못한 죽은 신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빛과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바치는 것이기도 하다(1371조)." 그러나 성경은 신자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성체성사를 드렸다고 해서 정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유일한 방법임을 말하고 있다(요 5:24).
상술한 바와 같이 미사 때 빵 조각을 먹는 것이 누군가를 앞으로 짓게 될 죄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가톨릭주의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전혀 없다. 이러한 교리의 주된 목적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체성사가 자신들을 죄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성체를 받기 위해 가톨릭교회에 반드시 출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들을 가톨릭교회의 굴레에 붙들어 놓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들이 규칙적으로 성체성사에 참석하면 고인이 된 사랑하는 가족이나 이웃이 보다 빨리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주장하는 것도 감언이설에 불과한 비성경적인 교리이다. 이러한 교리 역시 신자들을 가톨릭교회에 계속해서 붙들어 두려는 또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천주교는 기독교와 완전히 다릅니다>, 릭 존스, 그리스도예수안에, 100~104쪽).
다음으로 전직 가톨릭 사제들의 미사와 이와 관련된 성체성사와 화체설에 대한 견해를 보자.
(1) 미국 출신의 알렉산더 카슨 신부의 간증을 보자.
나는 미국 코네티컷 주 브리지포트 시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루이지애나 주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교구사제로서 사역을 시작했다. 어느 주일 밤 나는 신약성경의 히브리서를 읽기 시작했다. 이 서신서는 예수와 그의 제사장직과 그가 드린 제사가 옛 언약, 즉 구약의 모든 제도와 제사보다 뛰어나다고 가르친다. 그때 읽었던 구절들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히 7:27)."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고, 매우 불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예수의 제사가 갈보리에서 단번에 드려졌고, 나를 비롯하여 믿고 회개하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해 주는 제사임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나를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로마가톨릭 사제들이 매일 세계 도처에서 드리는 미사가 잘못된 것이며 완전히 무의미한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내가 사제의 자격으로 매일 드리는 제사가 무의미하다면, 그 제사를 드릴 목적으로 존재하는 내 '사제직'도 무의미했다. 이러한 깨달음은 계속해서 히브리서 10장을 읽어가면서 금방 확인되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2~14)."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8)."
그날 밤 나는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 로마교회는 분명히 성경에 위배되는 것을 진리로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나는 성경을 내 진리의 표준으로 삼았고, 더 이상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학권을 내 표준으로 삼지 않았다. 사도행전 6장 7절에 나오는 유대인 제사장들처럼, 나는 '이 도에 복종'’했다. 나는 주교에게 로마가톨릭교회와 그 사역을 사임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면서, 미사가 하나님의 말씀과 내 양심에 위배되기 때문에 더 이상 미사를 드릴 수 없어서 사제직을 떠난다고 진술했다(<교황 대신 예수를 선택한 49인의 신부들>, 리처드 베닛, 아가페출판사, 70~72쪽).
(2) 멕시코 출신의 시프리아노 발데스 하이메스 신부의 고백을 보자.
나는 주교의 안수를 통해서 사제 서품을 받고, 로마가톨릭교회가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도록 사람에게 부여하는 기만적이고 거짓된 권한들을 받았다. 소름끼치는 고해소에 들어가 앉아 겉으로 드러난 죄든 은밀한 죄든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날 나는 그리스도를 내 마음대로 제단에 올려놓고 다시 제사를 드릴 권한을 받았다. 이제 나는 거짓되고 돈벌이가 되는 의식을 통해서 로마교회가 고안해 낸 장소인 연옥에서 영혼들을 건져낼 수 있었다.
사람들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불 못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 로마교회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이것이 진리와 얼마나 동떨어진 가르침인가! 얼마나 큰 오류인가! 그런데도 이것이 바로 내가 4년간의 힘겹고 치밀한 교의 및 도덕 신학을 공부한 결과로 믿게 된 교리였다. 따라서 나는 사제 서품식 때 동료 인간들의 죄를 사할 권세를 갖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죄가 하나님의 속성에 속한 일인 줄도 모른 채 온 마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러한 권세는 인간에게 양도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 로마가톨릭교회에서 20년간 사제로 지내오면서, 나는 이 터무니없고 부끄럽고 반성경적인 의식을 매일 시행하면서 군인들과 직장인들과 정치인들을 포함하여 사회에서 양심이 무른 사람들의 고해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제단에서 피 없는 그리스도의 제사를 반복하기 위해, 축성(祝聖)의 말을 통해 빵을 그분의 살로, 포도주를 그분의 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나는 이 권한을 기쁨과 존경으로 받아들였다. 내 손에는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신 우주의 창조주이자 영원하신 하나님이 들려져 있었다. 내가 과연 무슨 정신으로 20년간 줄기차게 그리스도를 제사 드리는 일을 해 올 수 있었단 말인가? 이것이 로마가톨릭의 미사에 참여한 나와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두렵고 수치스러운 장난이었던가!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절대로 반복할 수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마귀의 고안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롬 6:9)"고 말한다. 그런데 사제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피 흘림 없이 다시 죽으시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그렇다면 미사가 이룰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영혼들을 정결케 하고 연옥에서 그들을 건져낸단 말인가?
로마가톨릭 교의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모든 분자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충만히 거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얼마나 큰 거짓인가! 로마교회의 신성 모독적 거짓과 속임은 사제가 이른바 '축성'을 한 뒤에 빵과 잔을 들 때, 그리고 그동안 회중이 절하고 자기들의 가슴을 치고 혹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 '내 주이시며 내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이것은 창조된 물질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은 빵 조각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앞의 책, 96~98쪽)
(3)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코 마조토 신부의 간증을 들어 보자.
어느 주일에 나는 미사 찬송을 인도하고 있었다. 두 사제가 내 곁에 있었고, 성가대가 아름다운 소리로 찬송을 하고 있었다. 청년들 가운데 한 사람이 히브리서 10장 10절을 낭독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계속해서 11절이 낭독되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히 10:11)."
나는 곁에 있는 사제들에게 "저 청년이 낭독한 성경 말씀을 들었습니까? 여기를 한번 읽어 보세요" 하고 말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분의 제사는 완료되었습니다. 우리의 미사는 부질없는 짓입니다." 나는 큰 성당을 둘러보았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고, 이곳저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이 제사를 끝내셨습니다. 그분이 그 일을 하셨으니, 우리는 쓸데없는 짓을 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행복해서 울고 있었다. 마침내 내 마음에 선명하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단번에 영원히, 단번에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하신 것이다. 주님의 제사는 온 인류를 위해 충분하고 완전하다.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들 했다. 젊은 사람이 이렇게 큰 책임을 맡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들 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주교가 나를 만나러 왔을 때도 나는 같은 말을 했다. 주교는 내가 사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미사를 드릴 수 없었다.
어느 토요일 저녁에 사람들이 나에게 고해를 하러 왔다. 나는 그들에게 물었고, 그들은 내게 대답했다. "왜 이곳에 오셨습니까?" "제 죄를 자백하려고요." "당신은 예수를 사랑하십니까?" "예." "왜 예수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이 제 죄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좋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면 그분에게 가서 찬송을 드리십시오. 왜 당신의 죄를 저한테 와서 말하는 겁니까? 제가 당신의 죄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해서 고해성사는 아주 신속하게 끝났다. 하지만 수녀들은 주교에게 가서 내 이야기를 했고, 결국 나는 수녀들이 내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나는 나를 따르는 몇 사람들과 함께 로마가톨릭교회를 영원히 떠났다. 그 후 나는 로마와 영국과 네덜란드에 있는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과정에서 거듭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다(앞의 책, 277~278쪽).
지금까지 천주교의 미사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를 살펴보았다. 이제 개신교의 주일예배와 그 외의 각종 예배에 대한 비성경적인 면을 알아보자.
먼저 신약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개신교의 예배 역사의 흐름과 국내 개신교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1) 신약성경에 나타난 대로 주의 만찬 예배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제정되어, 초기 사도 시대와 교부 시대 그리고 수세기에 걸쳐 매주일 거행되었다(<성찬식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김만옥, 도서출판 목양, 63쪽).
(2) 4세기 이후에는 유대교와 이교도의 영향을 받은 로마가톨릭교회에도 미사를 위한 이교의 제사 의식이 생겨났는데, 이 미사의 극치는 항상 성만찬(주의 만찬)이었다.
(3) 이러한 성만찬은 16세기 종교개혁 때까지 로마가톨릭교회의 중심 예식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처럼 중세 때는 성만찬이 로마가톨릭 미사를 지배했고 설교는 뒷전에 머물러 있었다(<이교에 물든 기독교>, 프랭크 바이올라, 대장간, 150쪽).
(4) 그러다가 16세기 종교개혁 때 마르틴 루터 등 일부 개혁자들이 성만찬을 도외시하고, 설교를 예배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앞의 책, 151쪽).
(5) 그리고 츠빙글리 등 일부 개혁자들은 성만찬 없이도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되었다. 그 이후 개신교회에서는 성만찬 없는 예배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19세기 미국 개신교회의 예배는 성만찬 없는 예배의 절정이었다.
(6)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북미와 유럽에서 일어난 '예배 운동'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의 '성만찬 예배'의 중요성이 제고되면서, 성만찬이 예배에 없어서는 안 될 본질적 요소로 인식하게 되었다(<묻고 답하는 예배학 cafe>, 조기연, 대한기독교서회, 162쪽).
(7) 하지만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일 년에 두 번(부활절과 추수감사절) 정도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다<교회와 예배>>, 김영재,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69쪽).
(8) 예나 지금이나 한국교회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이 예배의 전부로 생각하며, 설교와 예배의 관계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예수님이 몸소 제정하신 성만찬에 대한 관심과 신학이 결여되어 성만찬은 예배의 부속물이나 중요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오로지 설교에만 최대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성만찬 없는, 설교 중심의 예배를 일 년 내내 계속하면서 그것이 예배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성만찬은 일 년에 봄, 가을로 두 번만 치르면 그것으로 의무를 다한 양 착각을 하고 있다(<성찬식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103쪽).
(9)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예언, 즉 말씀 사역인 설교의 목적에 대해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고전 14:3)"이라고 쓰여 있다. 이처럼 예언, 즉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유익을 얻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설교가 곧 예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앞의 책, 102쪽).
(10) 설교는 성직자와 무관하다. 설교는 예배가 아닌 '말씀 집회'로서 성만찬 예배를 드린 후에 말씀 사역의 은사를 가진 두 세 사람이 일어나 신자들에게 말씀을 증거 함으로 그 모임은 덕 세움을 입게 된다(고전 14:13).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회는 일인 독재 체제로서 성직자인 목사만이 혼자서 설교할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성직자인 목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약의 지역 교회의 직분은 장로와 집사밖에 없다(빌 1:1). 그리고 장로와 집사는 성직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직자인 목사와는 무관한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주의 만찬 예배' 즉 성만찬 예배밖에 없다. 이 성만찬 예배만이 신자들의 공적인 예배의 한 표현이다. 그 외 모든 다른 모임과 봉사는 사람들을 향하는 반면, 성만찬 예배는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에 '예배'로 불리는 것이다(<모임의 진리>, 노먼 크로포드, 기둥과 터, 40쪽).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는 예배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교회의 각종 집회를 예배라 칭하며, 심지어 각종 교회 행사도 예배인 양 착각하고 있다. 예컨대 주일 말씀 집회를 주일 오전 예배나 주일 저녁 예배라 칭하며, 그 외에 수요 기도회 예배, 금요 철야 예배, 매일 새벽 예배, 교회학교 예배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와 같이 교회 절기를 만들어 사순절 예배니 부활절 예배 등을 거행해 왔다.
그리고 각종 교회 행사도 예배인 양 착각하여, 이를테면 신년 예배, 광복절 기념 예배, 혼인 예배, 발인 예배, 헌당 예배, 개업 예배, 창립 예배, 박사 취득 예배, 장로 장립 예배, 출판 기념 예배 등 수십 가지 예배 종류를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엉터리 예배이며, 비성경적인 가짜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참예배와 가짜 예배가 있다. 참예배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드리는 예배이고, 가짜 예배는 인간이 만든 전통에 근거하여 드리는 예배이다. 사도바울은 '주의 만찬 예배'에 관한 지식을 승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말했다(고전 11:23). 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했다. "너희는 그런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였다(마 15:6)." "그들은 사람이 만든 법을 마치 내 교훈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으니 나를 헛되이 예배하고 있다(마 15:9)."
상기에서 전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참예배인 '주의 만찬 예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인간이 만든 전통에 근거한 가짜 예배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 말씀보다 사람이 만든 '전통과 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헛되이 예배'하고 있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헛되이 예배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거짓되고 성경적 근거가 없는 예배, 즉 비성경적인 엉터리 예배나 가짜 예배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금까지 천주교의 미사와 개신교의 예배에 관하여 비성경적인 여러 면을 살펴보았다. 천주교의 미사는 전직 사제의 말처럼 "나를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로마가톨릭 사제들이 매일 세계 도처에서 드리는 미사가 잘못된 것이며 완전히 무의미한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듯이, 헛된 예배이며 엉터리 예배인 것이다. 그리고 상술한 바와 같이 국내 개신 교파의 목사들이 일인 제사장이 되어 일요일마다 드리는 주일예배와 그 외 각종 예배들도 성경에 나오지 않는 비성경적인 엉터리 예배이며 가짜 예배다.
오늘날 국내 개신교회 중에 성직자인 목사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세칭 '평신도 교회'와 그 외 극소수의 교회들만이 성경적인 '주의 만찬 예배'를 드리고 있을 뿐이다. 이제 천주교인이든 개신교인이든 모든 기독교인들은 '천주교의 미사와 개신교의 각종 예배'가 비성경적임을 직시해야 한다. 나아가 그러한 비성경적인 엉터리 예배와 가짜 예배를 타파하고, 성경적인 '주의 만찬 예배'를 회복하여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