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밖의 구원 문제

 
개신교 일부 종파에서는 자기 교회에서 세례 받지 않으면 모두 지옥 간다고 말한다.
가톨릭은 가톨릭교회에서 세례 받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모든 인간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가톨릭교회에는 '교회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격언이 있었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나?
1. 성경과 교부시대(0-500년)
신약성경에는 구원을 받기위해서는 반드시 가톨릭교회 안에 머물러있어야 한다는 말이 없다. 하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6, 16)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4, 12)
이렇게 처음에는 구원이 '교회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신앙'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가톨릭교회가 안정되고 로마제국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신학자들은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가톨릭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신앙을 통한 구원'이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를 통한 구원'으로 바뀌고 있다.
초기 신학자 오리게네스(+253/254)와 치쁘리아노(+258)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사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아오스딩(354-430)의 제자들에게서 계속 발전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신학자 풀젠시우스(468-533)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다음의 사실은 의심 없이 가장 명백하다. 모든 이방인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 모든 열교인과 이교인들, 즉 가톨릭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속에 떨어질 것이다."
2. 중세의 확립(500-1500)
중세기에 와서 이러한 생각은 더욱 심화되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는 가톨릭교회를 구약시대 노아의 방주에 비유해서 교회가 구원에 불가피함을 선언하고 있다.
마침내 플로렌스공의회(1439-1445)는 풀젠시우스의 표현을 빌어 이 사상을 교리로 선포하고 있다. :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이나 열교인, 이교인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오히려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속' (마태 25, 41)에 떨어질 것이다. 오직 교회 안에 머무는 사람에게만 교회의 성사가 구원이 된다. 누가 아무리 많은 선행과 자선을 하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피를 흘렸다 하더라도, 그가 가톨릭교회와의 일치 속에 그 품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구원될 수 없다."
교부시대에 발전되어 중세에 확립된 이 엄격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근대로 들어오면서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비정한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3. 근대의 변화
이 엄격주의는 역사 안에서 조금씩 변화되었다.
첫째, 신대륙과의 만남이다. 1400년대 말부터 유럽 사람들은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하는데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와의 만남으로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유럽만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가톨릭만을 유일한 종교로 생각했던 유럽 사람들은 좀 더 넓은 세상에 눈뜨게 되었다. 특히 인도와 중국과 같은 나라에 있는 고도로 발달된 문화와 종교를 만나면서 아시아 사람들 모두가 세례 받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된다는 생각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둘째, 유럽의 교회분열이다. 1500년대 유럽에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가 갈라진 교회분열은 가톨릭교회의 승리주의와 자만심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톨릭교회에서 개신교가 갈라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 가톨릭교회만이 완전하고 유일한 구원을 준다는 생각을 반성하게 되었다. 가톨릭교회도 완전하지 않고 잘못을 할 수도 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1854년, 교황 비오9세(1846-1878)는 두 가지 사실을 구별하고 있다:
첫째, 가톨릭교회에 속하는 것이 구원에 꼭 필요하다.
둘째, 하지만 가톨릭교회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도 구원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하여 교황은 1883년, "참된 그리스도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은 희망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불가피한 무지로 참된 그리스도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 부여한 자연적인 법과 계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과 도우심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계속해서 1943년, 교황 비오12세(1939-1958)도 "교회에 명시적으로 속하지는 않지만 신앙과 사랑 안에서 정의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삶의 열망을 통해 구세주의 신비로운 몸에 이를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변화에 대해 보수적인 사람들은 계속 '교회밖에서는 모두다 지옥이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칼 라너(1904-1984)와 이브 콩가르신부(1904-1996)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부터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하고 다양한 연구결과를 제시하였다. 훗날 이분들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신학자로 활동하면서 공의회정신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게 된다.
특히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사상'은 이 어려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 '누가 하느님 보편적 계시의 숨은 부르심을 받아들여 양심에 따라 선의를 따라 산다면, 그는 이미 신앙과 희망과 사랑 안에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며,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내포하고 있는 명시적이지 않은 신앙은 그리스도교회와의 만남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되고 심화되는 것이다.'
4.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마침내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플로렌스공의회의 결정을 바꾸고 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교회헌장의 결정이다.
교회헌장은 먼저 신자들에게 구원을 위한 ‘굳건한 신앙’을 촉구하고 있다. :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로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14항)
그리고 본격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보편적 구원가능성을 천명하고 있다. :
먼저 예비자들의 구원가능성을 천명하고 있다.
"명백한 의지로 교회에 합체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예비신자들은 이 소망 자체로 교회와 결합된다." (14항)
다음으로 정교회나 개신교의 구원가능성을 선언하고 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완전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거나', '베드로의 후계자 아래에서 친교의 일치를 보존하지 못하는' 저 사람들과도 교회는 자신이 여러 가지 이유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15항)
다음으로 불교나 그 밖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구원가능성을 선포하고 있다.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느님의 백성과 관련되어 있다... 유일신을 신앙하는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16항)
마지막으로 아무런 종교가 없는 사람들의 구원가능성을 선포하고 있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16항)
가톨릭신자가 아니더라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신앙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왜 가톨릭신자가 되어야 하는가?"하는 점이 궁금하다.
가톨릭신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만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신자가 된다는 것은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첫 번째 의미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첫째, 종교상대주의다. 그렇다면 가톨릭이 다른 종교와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말인가? 특히 정교회나 개신교와도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구원은 본질적으로 예수님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실명이든 익명이든 모든 구원은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기에 가톨릭이 다른 종교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다.
또 가톨릭이 정교회나 개신교와도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를 계승하는 교회가 가톨릭교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도들 위에 교회를 세우셨고, 그 사도들의 후계자가 바로 교황과 주교들이기 때문이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이 '사도성'이 가톨릭교회가 참된 교회라는 가장 확실한 보증이다.
둘째, 선교활동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가톨릭은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구원의 보증이며, 선교는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였다. 따라서 선교가 필요한 이유는 가톨릭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톨릭을 통해 확실한 구원의 보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개방된 존재이어야 한다. 선교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표시... 바로 신적인 이웃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바오로도 선교를 자신의 삶이라고 했다. :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고린 9, 16)
선교는 결코 하나의 교회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선교에 있어서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와 관용의 마음도 필요하다.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세례 받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단선적이고도 편협한 사고에 물들어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흑 아니면 백이라는 '양자택일' 사상에 물들어 있다. 이런 시각으로는 오늘의 다양한 세상에 적응하기 어렵다. '어느 누구라도 최종적 의미에서 적으로 대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웃사랑의 참된 의미라면, 교회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호의로 대할 수 있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