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들의 신앙: 질문 1

샬롬 안드레아형제님, 요즘 인기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멋진대배우 유연석은 안드레아란 세례명을 가지고 있고 한국 가톨릭 어른이신 정진석추기경님도 안드레아더라구요! 덕분에 안드레아형제님도 너무나 멋진 세례명입니다! 자 이제부터, 질문 1부~ 1. 20p 하단 부분에는 (그러므로 우리는 금요일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날은 곧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는 날이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도 유효한 것인지요? 그리고 고기의 범위는 어떻게 될까요? 2. 28p 하단 부분에는 (하느님의 지선과 인류에 대한 사랑의 가장 풍만한 표현인 영적세계에 어찌 조화와 일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치한 교리에 대한 의무적인 신앙과 통일된 기관에 한마음으로 복종하기를 원하셨음이 분명하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29p 하단 부분은 (도대체 어디서 신앙과 치교의 근본적 일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이는 다만 가톨릭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라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는 가톨릭외에 일치성 없이 분열된 개신교 자체에 대한 부정혹은 이단규정으로 읽히는데 제 해석이 맞을까요? 혹여 오래전 쓰여진 이책과 지금의 관점이 다르다면 교리가 변한것인지요? 3. 지난번 첫번째 질문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관에 동의 한다고 하셨는데 가톨릭의 큰 어른이신 김수환추기경께서 도올 김용옥선생님과 나눈 대화에서 어떠한 종교를 믿든지 인간으로써 참되게 살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어떤 의미로 받아 드려야 할까요? 김수환추기경께서 언급하신 내용은 아래 링크 두번째 영상의 4분50초 부분을 참조 하시면 됩니다 네이버 카페 https://m.cafe.naver.com/ca-fe/web/cafes/grace0406/articles/75772?useCafeId=false 세개의 질문도 많지요? 저는 오늘 강릉에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잠시 강릉 바닷가에 가서 커피 한잔을 마셨는데 형제님은..... 아메리카노 좋아하시나요? 언제 한번 뵙기는 뵈야 할텐데 말이지요^^ 예전에는 안승준선생님께서 쟁취하라고 했는데 지금도 쟁취해야 하는지 ㅎㅎㅎ 어렵네요 다음 질문은 금요일에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샬롬

 
샬롬! 힐라리아 자매님!
 
드디어 질문을 주셨네요. 아, 요즘 정말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 장안의 화제인 건 맞는 듯합니다. 저는 아직 보지 않았는데 주위에서 하도 재미있다고 하니 언젠가 한 번 보고싶어지는 드라마입니다. 유연석 님이 안드레아였군요. ^^ 아, 그리고 정진석 추기경님은 니콜라오입니다. ^^ 안드레아는 지금 서울대교구장을 맞고 계신 염수정 추기경님이고요 . 괜찮습니다~ 세례명까지 다 기억하기는 어려운 일이에요. ^^
 
이제 말씀해 주신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적어보겠습니다.
 
1. 금육재와 금식식재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금요일, 특히 사순 시기의 금요일에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리고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과 부활 대축일 전 금요일은 성 금요일에는 금육재와 함께 금식재를 지킵니다.
가톨릭 교회법에 금식재와 금육재에 대한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제 2 절 참회 고행의 날 제 1249 조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하느님의 법률에 의하여 각자 나름대로 참회 고행을 하여야 하지만, 모든 신자들이 어떤 공동적인 참회 고행의 실행으로 서로 결합되도록 참회 고행의 날이 규정된다. 이런 날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기도에 몰두하고 신심과 애덕의 사업을 실행하며 또한 자기들의 고유한 의무를 더욱 충실히 완수하고 특히 아래의 교회법 조문들의 규범에 따라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들을 극기하여야 한다.
제 1250 조 보편 교회에서 참회 고행의 날과 시기는 연중 모든 금요일과 사순 시기이다.
제 1251 조 연중 모든 금요일에는 대축일들 중의 어느 날과 겹치지 아니하는 한 육식 또는 주교회의의 규정에 따른 다른 음식을 자제하는 금육재가 지켜져야 한다. 재의 수요일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신 성금요일에는 금육재와 금식재가 지켜져야 한다.
제 1252 조 14세를 만료한 자들은 금육재의 법률을 지켜야 하고 모든 성년자들은 60세의 시초까지 금식재의 법률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영혼의 목자들과 부모들은 미성년자들이기 때문에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킬 의무가 없는 이들도 참회 고행의 참 의미를 깨닫도록 보살펴야 한다.
제 1253 조 주교회의는 금육재와 금식재의 준수 방식을 더 자세히 규정할 수 있고, 또한 금육재와 금식재를 전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다른 형태의 참회 고행, 특히 애덕 사업과 신심 수련으로 대체할 수 있다.

 
교회법에서구체적인 금육재나 금식재의 방법을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지역 교회의 특성에 따라 주교들이 세세한 규정을 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금육재는 땅에서 나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고기는 상관 없고요, 우유, 계란, 기름을 사용한 음식 등도 허용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기에 금주나 금연을 사목 지침으로 넣어놓았고, 본당에 따라서 신부님들은 커피 등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기호품을 끊는 것으로 금육재를 지키기도 합니다. 또한 요즘은 '스마트폰 안 쓰기', '게임 안하기' 등 스스로 목표를 정해서 이를 실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학교나 회사에서 함께 식사를 해야 할 때 "나는 금육재를 지켜야 하니까 고기는 먹을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모두 함께 식사를 하고 정말 자신이 더 좋아하는 것을 끊고 절제해서 금육제를 지킬 수 있는 것이지요.
금식재는 세 끼 중 한 끼를 일반적으로 먹고, 한 끼는 요기만 하며, 나머지 한 끼는 굶습니다. 그 날은 간식 등도 일체 먹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지역 교회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한국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금식재를 지킵니다.
금식재와 금육재는 자신의 욕구를 줄이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도록 인도합니다. 이것이 '참회와 고행의 날'을 지키는 여러 방법 중 하나입니다. 중요한 것은 '음식을 끊는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정신입니다.
예전에 어떤 신부님의 강론이 생각납니다. 어떤 신자가 금요일에 금육재를 지켜야 한다면서 생선 횟집에 가서 회 한 접시를 안주 삼아 소주 서너 병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럼 이 사람은 금육재를 지킨 걸까요, 지키지 않은 걸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육고기를 먹지 않았으니 금육재를 지킨 것이겠지만 '참회와 고행'의 정신에 과연 부합하는지 생각해볼 일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도 이 강론 듣고 무릎을 쳤습니다. ^^
금식과 금육으로 절약한 돈을 자선 사업에 쓰거나 교회에서 이들을 위해 따로 준비한 헌금을 합니다. 보통 사순절 기간에 성당에서는 개인 당 한 개의 저금통을 주눈데, 여기에 금식재와 금육재, 그 밖에 여러 가지로 절역한 돈을 모아서 교회에 봉헌하도록 합니다. 교회는 이를 모아서 자선 사업을 하는 데에 사용합니다.
예전에 어떤 개신교 신자분께서 "그들은 혼인을 금지하고, 또 믿어서 진리를 알게 된 이들이 감사히 받아 먹도록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어떤 음식들을 끊으라고 요구합니다."(1티모 4,3)라는 말씀을 들어 가톨릭을 오해하신 일이 있습니다. 혼인은 교회의 7성사 중 하나일 만큼 중요한 것이고, '음식을 끊으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라는 것이지 언제나 특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거든요. 겉으로 드러나는 가톨릭의 모습을 보면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한 발짝만 가까이 와서 가톨릭에 왜 '독신제도'와 '금욕재, 금식재'가 있는지 살펴본다면 오해는 금세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에서 금육재와 금식재를 다룬 기사가 있어서 링크를 첨부합니다.
이 정도로 1번 질문에 대한 답을 마무리하겠습니다.
 
2번과 3번 질문은 '교회론'과 '구원론'에 관한 것이군요. 역시 주제가 굉장히 방대할 수도 있고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좀 더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라 일단은 이번 편지에서는 1번 질문에 대해서 먼저 답장을 보내드립니다. (자매님 덕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도 읽어 보고 있습니다~ ^^) 정리가 되는 대로 또 답장하겠습니다.
 
 

샬롬!
아직까지 서늘한 저녁바람이 머리를 맑게 해 주네요. 내일 출근만 아니라면 따뜻한 라떼 한 잔 마시면서 글을 쓰기에 딱 좋은 날인데요. 네, 저는 라떼 좋아합니다. 아메리카노는 왠지 저에게 너무 강해서요. ^^ 정말 더울 때는 시원한 라떼를 먹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는 따뜻한 라떼가 속을 더 편하게 해주더라고요. ^^ 언젠가 자매님과 안승준 선생님과 함께 좋은 시간 만들고 싶습니다. 최근 안승준 선생님이 자매님이랑 같이 곱창을 먹으러 가자 하더군요. 주말에 일정이 있서서 지금 살짝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는 충전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방전도 빨리 되는 몸인지라... ^^
이제 슬슬 2번 질문에 대한 답을 쓰기 시작하겠습니다.

 
2. 교회의 일치, 그리고 이단, 열교, 마침내 '갈라진 형제들'
우리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펀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가톨릭 교회는 '참 된 교회의 속성'으로 위의 네 가지를 꼽습니다. 그래서 하나로 일치된 교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올리브 산에서 하신 기도를 보면 이미 주님은 교회가 분열될 것을 내다보시고 마음 아파 하신 게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요한 17,21)
 
그렇죠. 예수님은 참하느님이시니 전지전능하시지요. 하느님이 어련하시겠나요.... 예수님의 기도는 성부 하느님께서도 꼭 들어주시기 때문에, 언젠가 교회는 다시 하나가 되겠지요.
사도 바오로도 교회의 일치에 대해서 정말 절절하게 씁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에페 4-1-6).
 
심지어 분열을 조장하는 코린토 교회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준엄하게 권고하기도 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클로에 집안 사람들이 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 바오로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기라도 하였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오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 (1코린 1,10-13)
 
이들을 미루어 볼 때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일치하기를 바라셨고 사도들에게도 이를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는 1054년 동서 교회의 분리를 겪었으며, 16세기의 소위 '종교 개혁'을 통하여 서방 교회가 대 분열되는 참극을 겪게 됩니다. 이는 어느 모로 보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아님을 저는 확신합니다. '교부들의 신앙'에서 교회의 일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개신교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정리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 전에 우선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이단'의 정의를 가톨릭 대사전을 통해 옮겨봅니다.
 
이단(異端, 라 haeresis, 영 heresy): 세례 받은 사람이 가톨릭의 교의(敎義) 중 일부를 거부하는 행위, 또는 거부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
 
이에 따라 가톨릭 교회는 초세기 신약 성경이 생기기도 전에 발생한 영지주의로부터 아리우스, 네스토리우스를 거쳐 중세의 알비파와 발도파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단과 싸우며 정통 신앙을 수호했습니다. 이들은 한결 같이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의 일부를 다르게 주장하며 끝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결국 비극의 그 시기가 다가옵니다. 바로 1521년의 소위 '종교 개혁'입니다.
 
가톨릭의 '이단' 정의에 따르면 종교 개혁을 통해 생겨난 개신교는 이단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의 많은 부분을 거부하고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을 신앙 기조로 들고나온 루터는 결국 교황 레오10세에 의해 파문됩니다. 그 이후 아시는 바와 갈이 분열의 불씨는 전 유럽 뿐 아니라 전 세계로 번져 활활 타올랐습니다.
 
물론 이런 종교 분열에는 가톨릭의 탓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당시 독일 가톨릭은 대사령('면죄부'라고 오역하는 말입니다)의 오남용이 심각했으며 이는 종교 개혁의 단초가 됩니다. 어쩌면 제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그 당시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이 고대의 이단을 대하던 그 태도로 루터를 정죄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때는 종교 뿐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많은 부분이 변해있었고 결국은 교회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단이 출현할 때마다 공의회가 열린 것처럼 이때도 트리덴티노 공의회(1545~1563)가 열렸고, 루터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확정하였습니다. 곧 성경 73권의 목록을 공의회 문헌에 명확히 밝히고, 살아있는 교회의 거룩한 전통인 성전(Traditio)을 천명하며, 연옥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였으며, 가톨릭의 의화와 구원에 대한 입장도 분명히하였고, 마지막으로 종교 분열의 불씨가 된 '대사'에 대한 입장도 밝혔습니다.
 
그런데 한국 가톨릭에서는 개신교를 다른 '이단'들과 구별하여 '열교'(裂敎)라고 불렀습니다. 라틴어와 영어의 표기는 '이단'과 같지만 뉘앙스가 다릅니다. 역시 가톨릭 대사전의 자료를 옮깁니다.
 
열교(裂敎): 이단을 일컫는 말. 19세기 이래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특히 개신교(改新敎)의 여러 종파를 가리켜 열교라 하였다. 열교는 전적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의 가르침에 순명해야 할 믿음의 기본자세를 떠나, 자신의 이해관계나 지식의 합리성을 기준으로 계시 진리에 대한 비판과 취사선택을 하는 것으로, 절대주이신 인류의 구세주께 대한 불충실함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열교인의 면책(免責) 가능성에 대하여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회의적으로 대답하며 은총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자를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Denz. 3013). 한 학자는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고 생활하는 가톨릭 교인으로서 결코 신앙을 바꿔야 하겠다는 양심의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B. Haring, Das Gesetz Christi II, 84)고 하였다.
따라서 열교의 가능성은 인간의 오만과 아집, 그리고 감정이 작용하여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한 지방이나 부족 전체가 공동체에서 이탈하게 되는 수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개인의 양심에 관한 문제보다는 공동의식, 관습, 일체감 등이 작용하여 분열의 고통을 보게 된다. 과거 16세기의 소위 종교개혁이 그 예이며 현대에 와서는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희생으로 교회가 분립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교부들의 신앙'은 바로 이런 시대상을 반영한 책입니다. 원본은 19세기에 쓰여졌는데 이때는 한창 개신교의 각 교파들이 분열하고 있을 시기입니다. 책의 머릿말을 통해서도 그 당시의 상황을 아실 것입니다. 이런 분열의 양상 속에 가톨릭을 공격하는 교파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호교론적인 책이 '교부들의 신앙'이었고 따라서 책의 저자도 방어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인 자세로 논지를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자는 분열의 양상을 보이고 있던 개신교를 비판하는 기조로 책을 기술했을 것입니다. 자매님의 질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개신교는 가톨릭 교회의 '이단'과 '열교'의 정의에 부합합니다.
 
그런데 '이단'이나 '열교'는 굉장히 공격적인 말입니다. "너 파문!"을 깔고 가는 선언적인 말이겠지요. "그래, 너 어디 한 판 붙자"는 느낌. 딱 그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를 이단, 열교라고 말하며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하느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일까요? 하나가 되라고 기도하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20세기에 접어들며 사회는 급격하게 변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톨릭 교회는 또 한번의 큰 결단을 하게 됩니다. 종교 개혁의 에너지를 받아 가톨릭 내부의 개혁을 일으켰던 트리덴티노 공의회는 400년이 지나서 다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교회 개혁과 쇄신의 정점을 찍게 됩니다. 여태껏 라틴어로만 봉헌하던 미사를 자국어로 봉헌하도록 전례를 개혁했고, 평신도의 역할과 중요성을 천명했습니다. 이와 함께 주목할 것은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으로 반포된 "교회의 일치 운동"입니다. 다음은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중에서 개신교에 대한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 20.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고 주님이시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심을 공적으로 선언하며 한 분이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드리는 저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본다. 물론 강생하신 하느님 말씀이신 그리스도, 구원 활동, 교회의 신비와 직무, 구원 활동에서 차지하는 마리아의 역할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가볍지 않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갈라진 형제들도 그리스도를 교회 일치의 원천과 중심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고 우리는 기뻐한다. 그들도 그리스도와 일치하려는 소망에 사로잡혀 더욱더 완전한 일치를 추구하며 어디에서나 여러 민족들 가운데에서 자기 신앙을 증언하려고 한다.
성경 연구 21. 성경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사랑과 존경은 우리 형제들을 항구하고 치밀한 성경 연구로 이끌어들인다. 복음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다”(로마 1,16).
성령을 부르며, 그들은 바로 성경에서 하느님을 찾고 있다. 예언자들이 예고한 분,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그러한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애, 하느님이신 스승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가르치고 수행하신 일들,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관상한다.
우리와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주장하지만, 성경과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와 달리 저마다 참으로 다르게 생각한다. 가톨릭 신앙에 따르면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일에서 정통 교도권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거룩한 말씀은 바로 대화 자체에서 하느님의 전능하신 손 안에 있는 탁월한 도구가 되어, 구세주께서 모든 사람에게 제시하시는 저 일치를 이루게 할 것이다.
성사 생활 22. 세례성사는 언제든 주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바르게 주고 또 필요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받는다면, 누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새로 태어나게 된다.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다”(콜로 2,12).[3]
그러므로 세례는 세례를 통하여 새로 태어난 모든 사람을 묶어 주는 일치의 성사적 끈이 된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는 오로지 시작이며 출발일 뿐이다. 세례는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생명을 얻도록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완전한 신앙의 고백, 바로 그리스도께서 바라신 구원의 제도로 들어가는 완전한 합체, 마침내 성찬의 친교를 나누는 완전한 참여를 지향하고 있다.
우리와 갈라진 교회 공동체들은 비록 세례에서 흘러나오는 완전한 일치를 우리와 함께 이루지 못하고 또 특히 성품성사의 결여로 성찬 신비 본연의 완전한 실체를 보존하지 못하였다고 우리는 믿지만, 그래도 그들은 거룩한 만찬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이 만찬이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는 삶을 상징한다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찬, 다른 성사들, 예배, 교회의 직무에 관한 교리를 대화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생활 23. 이러한 형제들의 그리스도인 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자라나고, 세례의 은총을 받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길러진다. 이러한 삶은 개인 기도, 성경 묵상, 그리스도인 가정생활, 하느님을 찬양하려고 모인 공동체의 예배에서 드러난다. 또한 그들의 예배는 공통된 옛 전례의 분명한 요소들을 때때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기도와 찬양에서 열매를 맺는다. 또한 생생한 정의감과 진실한 이웃 사랑도 생겨난다. 이러한 신앙은 또한 정신적 육체적 불행을 덜어 주고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사회생활 조건을 더욱 인간답게 개선하며, 세계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적지 않은 활동들을 펼쳐 왔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도덕 문제에서 언제나 가톨릭 신자들과 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고 또 현대 사회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똑같은 해결책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도 우리처럼 그리스도인 덕행의 근원인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고,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 3,17) 한 사도의 가르침에 순종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복음의 도덕적 적용에 관하여 일치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20-23항)

개신교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으로 크게 바뀌었습니다. 위의 공의회 문헌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전히 가톨릭 쪽에서는 개신교의 다른 점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죄해야 할 이단'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일치의 대상인 '갈라진 형제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톨릭의 교리가 바뀐 것이 아니라 개신교(그리고 동방 정교회)와의 일치를 위해서 대화의 손을 내민 것이라고 봅니다. 이는 이 글 앞에서 소개한 사도 바오로의 말씀,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2-3)을 실천하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드릴 때입니다, '교부들의 신앙'은 이 책이 쓰여질 당시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이고, 그래서 시대 정황상 가톨릭에 대한 개신교의 맹렬한 공격에 반격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집필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소개해 드린 다른 두 권을 포함한 대부분의 호교론적 책이 그렇습니다. 효고론 차제가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교부들의 신앙'의 "한국어판 서문"에도 이런 시대적인 차이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번역해서 출판하는 이유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신교 신자분들을 '갈라진 형제'라 부르며, 개신교는 '갈라진 교회 공동체'라 부릅니다. 이제 가톨릭 교회는 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가톨릭 교회 자신의 교리와 신앙의 유산을 살펴 점검하고, 갈라진 형제들의 상황을 알고 이해하며, 주님 안에서 일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도록 신자들을 가르치며 권면합니다. 지금 자매님과 나누는 이 대담들도 그러한 '일치 운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며, 일치를 위한 대화를 청하는 입장에서 상대방을 '이단, 열교'라는 적대적인 용어로 칭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옳지 않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 개신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 대한 입장도 크게 완화되어 '교화나 정죄의 대상'에서 '이해와 존중과 대화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마땅찮게 생각하는 극 보수 공동체들은 살아있는 교도권에 항거하여 결국 '이단'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단'은 참으로 묘한 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음 질문은 가톨릭의 '보편적인 구원'에 대한 사항이군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의거하여 포용의 정신을 강조하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어떻게 풀어가셨는지, 우리 교회의 구원관과 비교해서 알아보는 시간이 필요할 듯합니다. 세 번쩨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해야겠군요.

 
답장을 마무리하면서 자매님께서 걱정(?)해 주신 것에 대해 적어봅니다 ^^ 다행히(?) 저의 살들은 아직까지 건재한 듯합니다. 책을 보고 글을 쓰고 하면서 뇌를 활활 태우다 보니 밥도 많이 먹고 점심 간식도 먹고 그래요. 하지만 밤에 추가로 간식을 먹는 일은 없어요. 저도 살아야지요 ㅋㅋㅋㅋㅋ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 찬미 예수님!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 인사할 때 '찬미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매님께 이 인사를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자매님의 강권(?)에 굴복(!)하여 금요일 저녁 약속을 수락한 뒤에 머리를 조금 식힌 후 세 번재 질문에 대한 답을 작성하기 시작합니다. 금요일 밤부터 주말 동안의 일정을 생각하면 활자를 보지 않고 머리를 쉬게 해 주는 게 좋을 듯하나, 마음 속 어딘가에서 활활 타오르는 그 무엇이 있기에 일단은 써내려가보려 합니다.
 
3. '하느님께서 다 구원하신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을 알아보기 전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어떠하신지를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부분을 찾아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1티모 2,4)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도 지금은 여러분에게 자비가 베풀어지도록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지만, 이제 그들도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로마 10,30-32)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코린 5,15)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제때에 드러난 증거입니다." (2티모 2,6)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티토 2,11)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히브 2,9)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묵시 21,21)

 
이 말씀과 자매님의 질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는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가톨릭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인용합니다.
 

842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과 교회의 관계는 먼저 인류의 공통 기원과 공통 목적에 따른 유대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를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니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민족의 기원은 하나이고, 그 궁극 목적도 단 하나 곧 하느님이시다. 좋으신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 계획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고, 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는 거룩한 도성에 뽑힌 이들이 모일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비그리스도교 선언 1항).
843 교회는 다른 종교들이, 알려지지 않으셨지만 가까이 계신 하느님을 “어둠과 그림자 속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숨결과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들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선한 것과 참된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서 “모든 사람이 마침내 생명을 얻도록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주신 것”(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16항, 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이 조항을 보면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위한 대속'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교회의 가르침을 인용하겠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846 교부들이 자주 반복했던 이 단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이해할 때, 이 말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공의회는 성경과 성전에 의지하여 이 순례하는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개자요 구원의 길이시며,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을 분명한 말씀으로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셨다. 사람들은 마치 문과 같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교회 헌장 14항)

 
분명히 가톨릭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구원의 근원이심을 천명합니다. 아울러 당신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에 주신 매고 푸는 권한과 가르칠 권한(교도권)을 통하여 사람들을 가르칠 것을 명하셨음을 교회는 똑똑히 전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19-20)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6,18-19)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16)

 
교리서 846항은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다음에 답이 있습니다.
 

847 이 단언은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교회 헌장 14항)"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원을 '얻는다'가 아니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교회 밖의 사람들, 즉 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가능성을 천명한 것이지 그들이 '반드시 구원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계약서나 법 조문에서도 단어 하나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는데 하물며 공의회 문헌에서는 그 단어의 쓰임이 얼마나 엄정할지를 생각해 본다면 "가톨릭 교회는 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없이도 구원 받는다고 가르친다"고 말하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말이거나 아니면 가톨릭 교회를 중상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톨릭 교회가 '교회 밖 사람들'에 대한 구원 가능성을 천명한 것이 과연 성경과 위배되는 가르침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 계획"에 대한 말씀은 이미 이 답변의 시작 부분에 예시를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주권 행사'를 감히 사람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고 배워왔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3,18)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6,16)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교회 밖에 있는 그들'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과연 우리가 단언할 권리가 있을까요? 위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 받고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해야지, 아직 복음을 들은 적이 없가나 자기 탓이 아닌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아직 믿지 않은—믿음을 부인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까지 위의 말씀을 근거로 심판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저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감히 무엇이기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다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누구이기에 과연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판단하고 단죄하고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로마 11, 33-36)
 
심지어 '그분에게서 나온 만물' 중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만물'도 있을 터인데,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는(혹은 '그분을 위하여 존재하는') '만물'에 대해서 과연 우리가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언자 요나는 니네베에 회개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느님을 피해서 달아나지만 결국 니네베 성읍을 돌면서 말씀을 선포하고 마침네 니네베 성에 있는 모든 사람과 심지어 짐승까지도 회개를 했습니다. 이스라일 쪽에서 보면 니네베는 할례 받지 않은 이민족이고 야훼 하느님을 섬기지 않았던 도성이지요. 심사가 언짢아진 요나는 니네베 성이 어찌 되나 보려고 앉아있습니다.
 

요나는 이 일이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기도하였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말씀하셨다.
요나는 그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였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오르게 하셨다. 그러자 아주까리가 요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워 그를 고통스러운 더위에서 구해 주었다. 요나는 그 아주까리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 이튿날 동이 틀 무렵, 하느님께서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아주까리를 쏠게 하시니, 아주까리가 시들어 버렸다.
해가 떠오르자 하느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보내셨다. 거기에다 해가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어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요나 4)

 
결국 하느님은 그분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매우 크신 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마련하신' 성경 말씀을 들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며 감히 그분의 처분을 입에 올리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 7,1-2)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로마 14,4)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로마 14,10-11)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로마 12,19-21)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7-8)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3-48)
 
결국 그리스도인은 비 그리스도인과 평화로이 지내면서 그들을 존중해주고 나머지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주권에 맡겨야 합니다. 설혹 교회 밖 사람들이 악을 일삼는다고 해도 우리는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감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은 구원의 주권자이신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마치 자신이 하느님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욥기에서 세상의 고통과 불행에 대해 하느님께 대들며 항거하는 윱을 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사내답게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느냐? 너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려느냐? 네가 하느님 같은 팔을 지녔으며 그와 같은 소리로 천둥 칠 수 있느냐? 존귀와 엄위로 꾸미고 존엄과 영화로 옷을 입어 보아라. 너의 그 격렬한 분노를 쏟아부어라. 교만한 자는 누구든 살펴 그를 낮추어 보아라. 교만한 자는 누구든 살펴 그를 꺾고 악인들은 그 자리에서 짓밟아 보아라. 그들을 모두 흙 속에 숨기고 숨긴 곳에서 그들의 얼굴을 염포로 묶어 보아라. 그러면 나도 너를 인정하리니 너의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욥 40,7-14)
 
이상의 말씀을 볼 때 인간의 구원 계획은 하느님의 영역이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마련하신 성경 말씀을 가지고 비 그리스도인을 단죄하는 도구로 사용하면 결코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려봅니다.
 
드디어 자매님의 셋째 질문에 대한 답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우선, 추기경님께서 하신 말씀의 맥락을 짚어보려고 해당 강의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았습니다. 여기서 추기경님은 논어에 있는 '천' 사상과 가톨릭 사상을 연결하여 말씀하셨고, 그래서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이라해도 우리 조상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 있도록"(사도 17,27) 안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도올 선생님은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한 담론을 꺼내놓으며,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도 하느님이 분명히 계셨을 텐데 그것을 인정하면 소통의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이 배타성에 대한 추기경님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 맥락에서 추기경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 교회로서는 하느님 아니라도 이를 테면 불교 신자라 하더라도, 다른 종교니까, 다른 종교에 속하니까 안된다든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불교를 믿든지 다른 종교를 믿든지 인간으로서 참되게 사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다 구원해 주신다. 참되게, 양심대로 살면은..." -김수환 추기경-
 
위의 말씀을 요약해본다면, (1) 다른 종교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게 아니고, (2) 다른 종교를 믿어도 인간으로서 참되게 양심대로 살면 하느님께서 다 구원해 주신다가 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아레오파고스 전도를 담은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오로의 태도를 살펴보면 다른 종교와 대화할 때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비록 우상을 숭배하는 그리스인들을 보고 격분하지만 그 감정을 쏟아내어 터뜨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진 다신교의 입장을 존중해 주면서 그리스인들의 신앙에 함축되어 있는 하느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밝히고 나서야 참 하느님을 전달했습니다. 이렇게 다른 종교와 대화할 때 무조건 상대 종교를 무시하지도 않았고,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리라고 단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무지로써 믿지 않은 것과 알고도 믿음을 저버리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고 하여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이는 개신교 공동체의 일부 형제들이 보이는 배타성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핵심 부분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양심대로 살면 하느님께서 다 구원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추기경님께서 '교회 헌장'의 다음 부분을 토대로 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성무성성, 보스턴 대주교에게 보낸 서한, Dz 3869-3872 참조). 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사실 그들이 지닌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교회는 복음의 준비로 여기며(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 「복음의 준비」, 1,1, PG 21,28AB 참조.), 모든 사람이 마침내 생명을 얻도록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헌장 16항)

 
위의 가르침을 모르는 상태에서 보면 추기경님의 저 말씀은 종교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이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저 말씀에 대해서 추기경님께서 좀 더 부연설명을 하시면 어땠을까 싶지만, 본 강의의 문맥 상 "기독교의 배타성"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가톨릭의 구원관'을 피력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조금의 부연 설명을 통해서 본인 말씀을 곡해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셨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다' 구원해 주신다."는 엄청난 키배(키보드 배틀)의 떡밥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추기경님께서 저 영상이 저리 돌아다니며 마치 '밈'처럼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계신다면 어떤 기분이 드실까요...
 
여기에 덧붙여, 추기경님의 저 말씀은 "선교 무용론"을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선교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사명이고(마태 28,20; 마르 16,15),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구원의 가능성에 맡기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너무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로마 10,13-14)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유일한 구원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교회는 끊임 없이 선교에 힘써야 합니다. 물론 다른 종교를 비난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이 바른 선교가 아님은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져 그들도 우리들과 함께 "한 우리에서 한 목자 밑에" 살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여기서의 '모든 사람'은 심지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비 그리스도인도 포함됩니다.
둘째,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은 "예수님은 모든 구원의 근원이시며 이분 말고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권은 오직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셋째, 교부들의 가르침 중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교회에 맡겨진 계시 진리와 교도권으로 이를 실현합니다.
넷째, '비 그리스도인'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입니다. 이는 구원을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다섯째,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불교를 믿든지 다른 종교를 믿든지 ... 하느님께서 다 구원해 주신다'라는 말씀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 없이 구원이 이루어진다'거나 '종교 다원 주의'를 인정하신다거나 '선교 무용론'을 주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비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이 매우 함축적이고 따로 부연 설명을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로마 11,29)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부르신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구원 여정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다하여 죽게 되는 날까지 우리는 그 여정을 충실히 달릴 의무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들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거나 그 구원 문제에 대해서 속단하는 것은 구원의 주권자이신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함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루 빨리 구원의 확고한 보증이며 구원의 근원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길이며, 그래서 '구원은 ing'입니다. 비록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그래서 구원은 ing입니다.
 
마지막으로 성 금요일에 드리는 '보편 지향 기도' 중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소개하며 답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그리스도를 안 믿는 이들이 성령의 빛을 받아,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이들이 양심대로 살아가며, 진리를 찾아 얻게 하여 주소서. 아울러, 저희는 언제나 서로 사랑하며, 구원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달아, 이 세상에서 주님의 사랑을 밝히는 증인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처음 세 번째 질문을 시작할 때가 지난 목요일이었습니다. 이후 금요일 저녁에 자매님과 파비올라 자매님, 그리고 안승준 선생님과의 만남이 있었고 토요일의 일정을 소화한 후 오늘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다시금 든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하느님을 알려고 하지만, 하느님은 내 앎보다 훨씬 크시고 감히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도 결코 알 수 없는 분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 주권자로서 정하시는 일들에 대해 이렇게 미약한 제가 감히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보면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애써서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비추시는 깨달음의 빛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매님 덕분에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고 새로 공부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제가 믿고 있는 교회의 가르침을 더욱 더 공고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질문들을 하게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매님의 질문 속에서 제가 하느님과 더 깊은 친교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아울러 저의 답글을 읽으시는 자매님에게도 그러한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제가 제대로 서술하지 못한 내용이나 혹은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어디까지나 부족한 저의 탓임을 말씀드립니다.
 
편지를 마무리하려 하는데 벌써 자정이 넘었습니다. 어제(주일)는 삼위일체 대축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사도 바오로의 인사로 가름하겠습니다. 이 인사는 미사를 시작할 때 사제가 교우들에게 드리는 인사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2코린 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