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져준 너에게... - <조제>

카테고리
드라마/영화
작성일
Jan 20, 2021 11:5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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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조제>(2020)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의 내용누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져준 너에게

한강 공원에 돛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았던 날이 떠올라.
우리는 피자를 시켰지. 얼마 뒤 강물이 보이는 여기 명당 자리를 나는 열심히 지켰고 너는 피자를 들고 돌아왔어. 그러면서 너가 무슨 말을 했는 줄 알아?
"나, 가위 바위 보에서 졌어."
의야한 듯 무슨 말이냐 되물으니 너가 대답하더라.
"라이더 님이 그랬어. 배달 음식을 가지러 정문 앞까지 걸어오는 수고는 대개 가위 바위 보에서 진 사람이 도맡는다고. 그러니까 나는 졌어, 가위 바위 보에서."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너의 말이 좋았어. 재밌는 말이라고 생각했지. 근데 그 말,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무겁게 마음 깊이 새겨지더라고.
식당에 가면 언제나 먼저 너가 메뉴를 읽어 주었고, 카페에서는 손수 커피를 가져왔지. 차로 움직일 때면 아무리 먼데라도 너는 기꺼이 운전을 하고, 셀프 주유소에 들르기라도 하면 너는 주유구를 열고 주유도 직접 해주었어. 어쩌다 주정차 단속 구간에 잠시 차를 대놓으면 또 열심히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간식을 사 들고 왔던 거 기억나?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2급 시각장애인인 나랑 함께 하면서그렇게 너는 하지도 않은 가위 바위 보에서 늘 져 주었어. 지금까지도 고맙고 마음 아픈 일이야.
 

두 명의 '조제'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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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게>를 정말 재미있게 봐서 자연스럽게 영화 <조제>에 관심이 갔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인데 원작을 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평을 듣고 있더라구. '리메이크는 원작을 능가할 수 없다'는 예시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나? 무엇보다 이 영화, 우리 둘 이야기 같아서 결국 <조제>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두 편을 다 봐버렸어.
지체 장애인인 '조제'와 비장애인 청년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을 그린 두 작품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결을 지녔어. '쿠미코'와 '츠네오'의 이야기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상승과 하락이 분명하고 명확한 감정선을 보여준다면 '그녀'와 '영석'의 <조제>는 굉장히 잔잔하게 천천히 서사가 이어지고, 특히 '이별'보다는 '사랑'에 더 많은 필름을 할애했더라구. 그래서 다들 인생 로맨스라는 <조재,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느낌을 기대하고 <조제>를 본 사람들은 적잖이 실망을 했던 모양이야. 어쩌면 이 사람들에겐 원작이 독이 되었을 지도?
근데 나는 애초에 원작을 몰랐었기 때문에 마치 '두 명의 다른 조제'를 만난 기분이었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 이야기라서 그런지 내게 있어서 두 조재는 모두 소중하고 애틋하고 기특한 사람이었어. 유모차에 스케이트보드를 달고 전력 질주하던 명랑한 츠네오도, 떨어지는 나뭇잎 속에서 천천히 휠체어를 밀며 걷는 차분한 영석이도 모두 좋았지. 그래도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조제와 영석의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었다. 왠지 너랑 내 얘기 같았거든.
 

The Glenlivet Founder's Reserve Limited Edtion

"밥 먹고 가.""밥 먹고 가."
"밥 먹고 가."
조제가 왜 조제인 줄 알아?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한달 후, 일년 후>의 주인공 이름이 '조제'래. 그래서 이름을 묻는 영석이에게 '조제'라고 불러달라고 말했던 거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조제는 소설 속의 조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별을 예감하고 두려워했을 지도 몰라. 부모에게 버림 받고, 생면부지의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누구보다 이별의 아픔을 알고 있었겠지. 여자친구가 있음을 알고 영석을 밀어냈을 때도, 눈오는 그날 밤 영석이 불편한 존재라 말했을 때도 조제는 다가오는 새로운 사랑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겠지. 어쩌면 앞으로 가위 바위 보에 '항상 져줄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워서 조제는 스스로 얼음 벽을 둘러쳤으려나.
근데 그 벽을 녹인 건 영석이었어. 영석이는 대학 졸업반 취준생인데 남자친구가 있는 여교수에게 휘둘려서 기껏 면접을 본 회사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학과 교수의 감언이설에 속아 애먼 일거리를 떠맡기도 해. 어찌보면 참 팍팍하고 불안정한 인생이지. 그런 불안한 미래 속에서도 카페 서빙을 하며 열심히, 차분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영석에게 조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어. 면접에 떨어진 날 학과 교수와 함께 간 바에서 교수는 의기양양하게 제자에게 귀한 위스키를 자랑하며 권했지. 'The Glenlivet Founder's Reserve Limited Edtion'. 교수는 면접에서 떨어진 건 여교수의 농간이라고 슬며시 얘기했는데 열받은 영석이는 단숨에 이 위스키를 들이키면서 말하지..
"이게, 이런 맛이었네..."
영석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거야. 어느 날 조제는 영석에게 버려진 병들 중에 위스키 병 하나를 찾아달라 부탁해.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은 비어 있는 위스키 병에서 조제는 'The Glenlivet Founder's Reserve Limited Edtion'을 읽어내지. 조제는 영석을 비어있는 위스키 병들이 진열된 자신의 공간으로 안내해. 거기서 둘은 빈 병에서 위스키의 잔향을 맡게 되는데, 둘이 뭔가를 공유하기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겠어. 조제랑 내밀한 교감을 나누던 그곳과 그 병과 그 잔향을 영석은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거야. 틀림 없이 영석이는 지금 인생의 쓴맛을 느끼면서 조재를 그리워했을 거야.
"니깢게 왜 나를 동정해? 불편하다는 말 기억 안 나? 네가 불편하다고 했잖아" "니깢게 왜 나를 동정해? 불편하다는 말 기억 안 나? 네가 불편하다고 했잖아"
"니깢게 왜 나를 동정해? 불편하다는 말 기억 안 나? 네가 불편하다고 했잖아"
조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게 되자 영석은 그길로 버스를 타고 조재의 집으로 향했어. 혼자 있을 조제가 걱정된다고, 문틈으로 겨울 바람이 들어와서 추워 보인다고, 문 손집이도 불편해보인다고 걱정을 늘어놓으며 어떻게든 조제의 공간에 있고 싶어해. 그렇지만 조제는 불편하다며, 니깢게 왜 나를 동정하느냐며 영석을 밀어내지. 결국 영석은 대문 밖으로 나가는데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고...
뒤에서 대문이 열리고 휠체어 미는 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보는 영석. 거기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조제가 있어. 천천히 다가가는 영석. 그리고 조제와 눈높이를 맞추며 휠체어 손잡이에 걸쳐 있는 손을 꼭 잡아주는 영석.
— 조제: 가지 마. 부탁할게. 옆에 있어줘. 계속 그렇게 있어줘. 부탁할게.
— 영석: 그렇게 할 거예요. 계속 옆에 있을게.
그리고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사랑을 나누기 시작해. 눈이 내리던 바로 그날 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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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에게 걸어오던 소리가 기억 나""네가 나에게 걸어오던 소리가 기억 나"
"네가 나에게 걸어오던 소리가 기억 나"
"계속 엎에 있을 거야""계속 엎에 있을 거야"
"계속 엎에 있을 거야"
 
어느날 조제는 영석에게 깨진 벽의 구멍 사이로 호랑이를 보았다고 말해.
— 조제: 호랑이가 담을 넘어와도 난 무섭지 않았을 거야. 니가 있으니까.
— 영석: 내가 먼저 먹히고 있을 테니까 먼저 도망쳐.
조제는 아마도 이제 이별의 불안함을 견딜 수 있게 된 걸까, 하지만 영석은 아직 조제와의 '이별'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아. 조제가 <내 사랑 안녕>을 꺼내 읽고 있을 때도 알아차리지 못했거든. 처음 조제를 알게 되었을 때 조제가 사다 달라고 부탁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책도 결국 사랑과 이별에 대한 책이었어. 물론 그 책 찾기 엄청 힘들어서 헌책방을 뒤지는 영석은... 또 그렇게 가위 바위 보에서 졌겠지.... 마치 너처럼 말이야.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 물고기들... 나는 괜찮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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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는 글렌리벳 위스키의 본고장인 스코틀랜드의 스페이사이드로 여행을 가고 싶어했어. 영화는 끝으로 치달으면서 "5년 후"로 건너뛰는데 여기서 나, 많이 당황했다. 어쨌건 화면이 밝아지는데... 어? 정말로 그렇게도 그리던 스코틀랜드의 전경이 펼쳐지는 거였어. 조제를 업은 영석은 언덕을 오르고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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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고 싶어 하던 스코틀랜드 바다에 영석과 함께한 조제. 늘 꿈꾸어 오던 것이 이루어진 걸까. 그러나 돌연 옆에 있다고 생각했던 영석은 사라져버렸어. 그렇게 조제 혼자 있다고 생각한 화면은 사실 스마트폰 속의 구글 스트리트 뷰였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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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영석이 조제에게 가고 싶은 곳을 물었을 때 조제는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라 말했고 영석은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이곳을 보여주었어. 조제는 구글 맵과 스트리트뷰로 그곳에 간 상상을 했던 거야. 깨끗이 정리된 조제의 공간, 그리고 거기 벽에 붙여두었던 스티커에 적혀있던 영석의 번호는 오래전에 화이트로 지워져 있었지.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제는 운전도 배웠고 같은 보육원에 다니던 친구에게서 용달 트럭도 받았어. 능숙하게 차를 몰고 여태껏 방에 모셨던 할머니의 유골함을 납골당에 안치하고 돌아오는 길. 그렇게 조재는 영석이 없는 삶을 담담하고 꿋꿋하게 살아내고 있었어.
영석이는 예전 사귀었던 그 여자친구가 모는 차의 조수석에 탔어. 여전히 영석은 팍팍한 삶을 사는 것 같아. 눈치 보여서 제때 퇴근도 못하고. 그녀는 영석에게 청첩장을 내밀었고 거기엔 '이영석'과 여자친구의 이름이 적혀 있었어. 곧 둘은 결혼을 하겠지.
신호대기로 멈춰있을 때 창밖으로 휠체어를 타고 있는 여자가 길을 건너려 하고 있었어. 마음이 복잡한 영석. 결국 그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고개를 왼편으로 돌렸어. 거기에는 바로 옆에 멈춰 선 조재의 트럭이 멈춰있었지. 흘끗 조제를 본 영석은 다시 시선을 떨구지만 영석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며 그녀 모르게 눈물 방을울 만들고 말아.
 
조제는 자기 차에 물고기 모양의 장식을 달고 다녀. 영석을 놓아주던 수족관 속 물고기들을 떠올리고 그를 추억하고 싶었던 걸까. 수족관에서 조제는 영석에게 담담하게 말해.
난 이제 괜찮아. 우리는 쟤네들이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만, 몰고기들이 보기엔 우리가 갇혀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갇혀있어도 좋다고 생각했어. 우리 둘이라면... 저 중에서도 행복한 물고기가 있겠지? ... 이제 괜찮아. 외롭지 않아. 니가 내 옆에 없다고 해도... 난 니가 옆에 있는 걸로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는... 괜찮지가 않아. 나는 니가 없으면 외로워. 니가, 내 옆에 없다는 건 아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매주 한 번씩 널 만나려고 탔던 기차를 못탄지 벌써 석 달이나 되었어. 미치도록 보고싶다, 나는... 조제가 아니야.
알고 있어. 지금까지도 언제나 너는 가위 바위 보에서 져주었다는 걸. 그리고 앞으로도 기꺼이 져줄 거라는 걸.
그게 또 너무 미안하면서도 나는 너의 손을 놓을 자신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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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게 놓아주는 조제의 손을 영석이 다시 붙잡았지만 결국 둘은 운행을 마친 대관람차에서 내렸던 그때처럼 그렇게 손을 놓아야 하겠지. 영화 <조제>는 그렇게 둘의 사랑과 함께 막을 내렸어.
어쩌면 비장애인이 보기에 <조제>는 굉장히 불친절할 지도 모르고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지만 나는 정말 공감이 되는 영화였어. 너는 어땠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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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탄 관람차는 지금 어디쯤을 돌고 있을까? 분명 아직까지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르지는 않았을 거야. 조재와 영석이 현실을 받아들인 것처럼 나와 너도 우리만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내야 하겠지. 앞으로 우리는 아직도 함께 걸어야할 오르막이 남아있으니까.
이 글 쓰면서 너가 정말 정말 보고싶어졌어. 그래서 조심스럽게 기차표를 끊었어. 용기를 갖고 다시 너의 손을 잡으러 걸어가려고.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곧 너에게 달려갈 거야, 언제나 져준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