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바꾸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대대적인 사업 재편 나선 대기업 - 매일경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당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밝힌 신경영 선언이다. 회사 내부 위기가 커지자 이 회장이 밝힌 이 선언은 초일류 기업 삼성의 중요한 발판 역할을 했다. 이 덕분에 삼성전자 매출은 1993년부터 지난해까지 31배 뛰었고 영업이익은 50배 이상 증가하며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최근에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미중 무역분쟁 등 세계 경제 불확실성이 높아진 데다 국내 경기도 불황에 빠지면서 주요 기업마다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꾸준히 수익을 내더라도 미래 성장동력이 아니면 미련 없이 매각하는 등 과감한 사업 재편에 나섰다.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면 수십조, 수백조원 투자를 감행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한 ‘선택과 집중’ 전략이다. 물론 사업 재편이 반드시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업 경영에 독이 되는 실패 사례도 적잖다. 생존 경쟁에 나선 기업들의 사업 재편 전략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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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성공 안주 않고 新사업 과감히 베팅
핵심사업 매각·M&A…사업 재편 속도
기업은 늘 변화에 직면한다. 지금처럼 대내외 경영환경이 녹록지 않은 상황일수록 기업들은 ‘생존’을 외친다. 그만큼 상황이 급격하게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기업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굴지의 다국적 기업 생존율도 생각보다 높지 않다. 1990년 ‘포춘 500대 기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글로벌 기업 중 지금도 500위권에 올라 있는 기업은 100개도 채 안 된다. 기업 5곳 중 4곳은 생존 경쟁에서 밀려났거나 아예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의미다.
앞으로 기업 순위 바뀜은 더 다이내믹해질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는 제조업 중심의 전통적인 기업이 주로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아마존 등 IT 기반의 SW 기업이 순위표 꼭대기에 있다. 미래 핵심 산업인 IT 산업은 트렌드가 보다 빨리 바뀐다. ‘아차’ 하는 순간 추락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사활을 걸고 사업 재편에 나서는 배경은 여기에 있다. 기업 사업 재편 방식을 유형별로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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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야 산다?
▷LG·한화 등 ‘필요 없는 사업 팔아라’
새로운 물건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곳간을 비워야 하는 법. 설사 그것이 현재 높은 수익을 내는 사업이라고 해도 기업이 생각하는 미래가치와 맞지 않는다면 과감히 내치는 것이 낫다. 지난 1년 새 주요 기업은 잇따라 사업 정리에 나섰다.
가장 적극적인 기업은 구광모 회장 취임 이후 체질 변화에 속도를 내는 LG그룹이다. 적자에 허덕이거나 전망이 밝지 않은 사업은 과감히 버리는 중이다. 그룹 핵심 계열사인 LG전자부터 그렇다. 지난 2월 LG전자는 연료전지 사업에서 전격 철수했다. 영국 롤스로이스와 합작 형태로 운영했던 LG퓨얼셀시스템즈(이하 LG퓨얼셀)를 청산하기로 합의하고 자산 처분에 들어갔다. LG그룹은 LG퓨얼셀에만 2000억원 넘게 투자했지만 결실을 내지 못하자 끝내 사업을 접었다.
다른 계열사도 마찬가지다. 주요 계열사마다 불필요한 사업을 속속 정리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최근 일반 조명용 OLED 사업에서 철수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진다. LG이노텍 역시 기판소재사업부 내 고밀도다층기판(HDI) 사업 철수를 검토 중이다. LG화학은 LCD(액정표시장치) 소재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LG그룹의 사업 재편은 재계에서 적잖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지금까지 LG는 변화보다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LG그룹 사업 재편은 이제 시작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조만간 열릴 예정인 구광모 회장 주재 그룹 경영전략회의(사업보고회)에서는 계열사 사업 재편과 ‘선택과 집중’ 전략이 핵심 화두에 오를 전망이다.
재계 안팎에서는 스마트폰처럼 적자에 허덕이는 핵심 사업이 매각 대상에 오를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온다. LG전자 스마트폰 사업은 올 1분기까지 16분기 연속 영업손실을 냈다. 비록 경기도 평택 스마트폰 생산라인을 베트남 ‘LG 하이퐁 캠퍼스’로 재배치해 수익성을 높일 계획이지만 얼마나 성과를 낼지는 미지수다.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시장에서 LG전자 스마트폰 경쟁력이 높아지지 않는 한 수익성 개선에 한계가 있다. 적자가 계속 이어질 경우 스마트폰도 사업 재편 대상에 오르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귀띔했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을 솎아내는 대신 신규 사업에는 많은 돈을 쏟아붓는다. 자동차 전장과 5G, 로봇, 첨단소재 등이 대표적이다. LG전자 입장에서 자동차 전장은 지난 몇 년간 계속 적자를 기록하는 애물단지지만 향후 전망이 밝다는 판단 아래 투자 규모를 더욱 늘릴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LG전자는 오스트리아 전장조명 회사 ZKW를 그룹 사상 최고 인수합병(M&A) 금액인 1조4440억원을 들여 인수했다.
LG화학 역시 신학철 부회장 주도로 첨단소재 사업에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보인다. LG화학은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통해 첨단소재사업본부를 신설하면서 첨단소재 사업에 힘을 실어줬다. 고강도 자동차 경량화 소재, 디스플레이 소재, 양극재(배터리 소재)를 비롯한 친환경에너지 분야 소재 사업에 주력할 예정이다. 신 부회장은 “4차 산업혁명 영향으로 소재 분야에서도 끊임없는 혁신이 필요하다. 첨단소재 사업을 석유화학, 전지 사업에 이어 제3의 성장축으로 적극 육성할 것”이라는 야심 찬 계획을 밝혔다. LG 관계자는 “인공지능(AI)과 로봇, 자동차 전장부품을 비롯해 투자 우선순위가 높은 신사업에 집중할 계획이다. 계열사별 사업 재편이 전방위적으로 추진되면서 내부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기업마다 군침을 흘리던 알짜 사업이라도 돈이 안 되면 과감히 처분하는 경우도 적잖다.
면세점 사업이 대표적이다. 한화그룹은 ‘황금알’로 불리던 시내면세점 사업에서 3년여 만에 전격 철수했다. 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는 최근 이사회를 열고 오는 9월 서울 여의도 갤러리아면세점63 영업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2015년 말 이후 3년여간 1000억원 이상 적자를 내면서 더 이상 면세점 사업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회사 측은 “백화점 사업 경쟁력을 높이고 신성장동력 사업을 본격 추진하려는 경영적 판단에 따른 조치”라고 설명했다. 2015년 면세점 허가를 받은 서울 시내면세점 중 영업을 접는 것은 한화가 처음이다. 한화의 면세점 사업 철수로 중소·중견업체도 잇따라 면세점 사업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영원히 잘되는 사업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업들이 예전과 비교해 사업을 버리는 판단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재계에서는 태양광 사업 부진에 시달린 한화그룹이 면세점 사업을 대신할 만한 신규 먹거리를 찾아 나설 것이란 관측을 내놓는다. 앞서 한화그룹은 2014년 말 삼성그룹과의 석유화학, 방산사업 빅딜로 재미를 보기도 했다. 비록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 뛰어들지 않겠다고 못 박았지만 언제든 항공사를 포함한 대형 매물 인수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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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이 화학 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사진은 롯데케미칼타이탄 말레이시아 공장. <롯데케미칼 제공>
▶‘쩐’이 미래를 보장하노라
▷삼성·SK 등 대규모 투자로 승부수
단순히 불필요한 사업을 매각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 수는 없다. 곳간을 비웠으면 이제 새로운 물건을 채워야 한다.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천문학적인 투자 규모로 ‘기선 제압’을 하는 형태다. 삼성전자가 대표적인 사례다.
1분기 실적 악화로 한동안 긴축경영을 펼치나 싶던 삼성전자는 최근 133조원의 투자 계획을 전격 발표하면서 재계를 놀라게 했다.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에 133조원을 투자해 세계 시스템 시장 1위에 오르겠다는 로드맵을 밝혔다.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선제적인 투자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전략으로 풀이했다. 삼성전자가 미래 10년을 내다보는 투자 계획을 밝힌 것은 2010년 이후 10년여 만에 처음이다. 삼성전자가 실제 계획대로 투자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약속한 투자 금액 자체가 범접하기 힘든 수준이다. SK그룹 역시 반도체 사업에 대한 ‘통 큰 투자’로 미래를 대비하는 모습이다. SK하이닉스는 차세대 반도체 클러스터로 지정된 경기도 용인에 2022년 이후 총 120조원을 투자한다. 팹(실리콘웨이퍼 제조공장) 4개를 건설해 용인을 새로운 반도체 도시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만 SK는 반도체 사업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분위기다. 신성장동력 발굴을 위해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일례로 10억달러를 투자해 베트남 최대 민간기업 빈그룹 지분을 매입하기로 해 눈길을 끈다. 빈그룹은 베트남에서 아파트, 리조트, 자동차 등 다양한 사업을 해왔다.
앞서 SK그룹은 지난해 베트남 2위 기업인 마산그룹 지주사 지분을 4억7000만달러에 매입하기도 했다. 베트남 1·2위 민간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맺은 셈이다. 중국 시장에서는 중국 최대 석유화학 기업 시노펙과 SK종합화학 합작사 중한석화를 통해 현지 정유 기업인 우한분공사를 인수합병하기로 했다. 중한석화는 2013년 가동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누적 영업이익이 2조원을 넘어설 정도로 대표적인 글로벌 투자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번 인수를 통해 중국 시장 경쟁력을 더 높이겠다는 포부다. 최태원 SK 회장의 ‘차이나 인사이드’, 즉 외부자가 아닌 내부자로 중국 시장에 진출한다는 전략이 속도를 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유통업 부진에 시달려온 롯데그룹은 화학 사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삼고 과감한 베팅을 하는 중이다. 지난 5월 9일 미국 루이지애나에서 열린 롯데케미칼 에탄크래커 공장 준공식에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직접 참석할 정도로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루이지애나 공장은 북미 지역에서 조달하는 셰일가스를 원료로 에틸렌과 에틸렌글리콜을 생산하는 시설이다. 축구장 152개 크기의 초대형 플랜트로 투자 규모만 31억달러, 우리 돈으로 3조6000억원에 달한다. 이 공장이 예정대로 가동되면 롯데의 에틸렌 생산량은 연간 292만t에서 450만t으로 대폭 늘어난다. 이 덕분에 현재 글로벌 11위 석유화학사인 롯데케미칼은 단숨에 7위로 도약할 전망이다.
큰 규모의 M&A는 아니지만 소규모 스타트업 투자에 눈독 들이는 곳은 현대차그룹이다. 현대차그룹은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자율주행차, 드론(무인항공기) 등 글로벌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 투자하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수시로 북미를 방문해 창의적인 스타트업을 발굴, 투자하는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현대차가 지난해 투자한 스타트업과 벤처펀드만 총 22곳, 993억원에 달할 정도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 중국 등 글로벌 시장 부진에 고민이 커진 현대차그룹은 아예 ICT 기업으로 체질을 바꾸려는 분위기도 엿보인다. 급변하는 글로벌 자동차 시장 패러다임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이라고 귀띔했다.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도 저마다 생존 경쟁에 한창이다. 유료방송 업체 인수 이후 새로운 전략 마련에 고심 중이다.
LG유플러스는 CJ헬로비전 인수에 따른 시너지 효과 찾기에 분주한 모습이다. SK텔레콤은 티브로드 인수를 마무리하고 지상파 3사와 함께하는 ‘푹+옥수수’를 국내 1위 인터넷 스트리밍 방송(OTT)으로 키운다는 계획을 세웠다. LG유플러스와 SK텔레콤이 바짝 추격하면서 유료방송 1위 업체 KT는 비상이 걸렸다. 케이블TV 3위 사업자인 딜라이브 인수를 위해 정치권 눈치를 보고 있다. 통신 3사는 적극적인 M&A를 통해 시장점유율을 늘리는 동시에 이른바 ‘탈통신’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먹을거리 찾기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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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기업의 변신
▷전자상거래·콘텐츠 영역 확장
전통적인 제조업체에 비해 잘나간다는 IT 업계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내 IT 업계 쌍두마차인 네이버와 카카오는 단순히 IT 분야를 넘어서 새로운 영역 확장에 나섰다.
두 기업이 보유한 가장 큰 장점은 플랫폼의 힘이다. 네이버는 검색 시장, 카카오는 메신저에서 힘을 발휘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지속적으로 이익을 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양한 분야에 뛰어들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자상거래 분야다. 지난해 네이버는 N스토어, 카카오는 카카오커머스를 새롭게 설립하고 전자상거래 확대에 나섰다. 우선 네이버는 대부분의 오픈마켓 사업자가 판매자로부터 8~15% 수준의 수수료를 수취하는 것과 달리 2%의 낮은 수수료만 받는다. 비교적 후발주자지만 국내 포털 점유율 70% 이상을 차지하는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기존 업체들이 마냥 무시하기 어렵다. 카카오 또한 커머스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이 거론된다. 네이버와 카카오가 전자상거래 시장에 적극 뛰어들면서 기존 전자상거래 기업은 물론 유통시장 강자인 롯데, 신세계와 한판 격돌이 예상된다.
콘텐츠 분야를 확대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행보다. 지금까지 네이버나 카카오는 직접 콘텐츠를 생산하기보다 플랫폼을 통한 유통에 주력했다. 하지만 카카오는 지난 몇 년간 다수의 연예기획사를 인수하면서 기존 카카오 플랫폼과 시너지 효과를 내는 데 주력하는 모습이다. 네이버 또한 오디오북 전문업체인 ‘오디언소리’를 인수하며 콘텐츠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기업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업 재편에 나서지만 좀처럼 방향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부지기수다. 고민 끝에 아예 컨설팅 업체에 사업 재편 방향을 묻는 기업도 부쩍 늘었다. LG유플러스는 베인앤컴퍼니와 손잡고 CJ헬로 인수 이후 시너지 창출 전략을 짜는 중이다. LS산전 역시 전통적인 제조업체에서 서비스 업체로 변신하기 위해 롤랜드버거, PTC 등 주요 컨설팅 업체 문을 두드렸다. 이를 통해 사물인터넷(IoT)를 활용한 변압기 원격 점검, 부품 교체 등 서비스 사업에 나설 예정이다. 건설경기 불황에 고민이 커진 대우건설은 지난해 맥킨지의 경영진단 결과를 바탕으로 사업 재편, 중장기 성장동력 발굴 등을 담당하는 기업가치제고본부를 신설했다.
재계 관계자는 “산업의 ‘판’이 바뀌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존 업(業)에 안주했다가는 경쟁에서 뒤처져 문을 닫을지 모른다”며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고 주력 산업이 중국의 맹추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기업마다 생존을 위해 ‘비주력 사업 매각 → 신사업 발굴 → 인수합병 대상 물색’으로 이어지는 사업 재편에 나서는 중”이라고 분석했다.
[특별취재팀 = 김경민(팀장)·박수호·강승태·나건웅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08호 (2019.05.15~2019.05.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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