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카테고리
낙서
추억
작성일
Jun 1, 2022 12:45 PM

배밭과 들판이 펼쳐진 강남

내 고향은 강남이다. 정확이 말하면 을지병원 어느 분만실이겠지. 그리고 사방이 배밭이었던 어느 동네에서 나는 자랐다. 우리는 땅을 파고 그 속에 집을 만들어(!) 살았다. 여름이 되어 비가 들이치면 언제나 홍수를 걱정해야 했다. 물론 나는 그런 걸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어느날 여름 방, 엄마 등에 업혀서 너른 들판을 바라보며 아빠가 돌아올 시간을 기다리던 기억의 조각이 있을 뿐이다.
엄마 손을 붙잡고 국민학교에 간 날, 나는 거의 패닉 상태였다. 교실을 가려면 실내화로 갈아신어야 하는데 뒤에서 우르르 달려오는 놈들 때문에 내 신발 한 짝이 어디론가 날아갔고, 나는 그걸 찾느라 더듬거렸다. 아마도 나랑 같은 반인 어떤 녀석이 도와주었던 것 같다.
엄마는 큰 마음 먹고 국민학교 1학년 5반 학생으로 내 옆자리의 짝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잘 안 보이는 칠판 글씨를 불러주는 엄마, 체육 시간에 선생님의 동작을 따라하는 엄마, 교실 바닥을 걸레로 박박 문지르는 엄마, 배가 아프다며 중간에 조퇴하는 녀석을 나랑 그녀석 집이 있는 성남까지 바래다주는 엄마와 함께 1년을 보냈다.

나도 자라고, 강남도 자라고

고향을 달리는 지하철고향을 달리는 지하철
고향을 달리는 지하철
건물은 어릴 때 그대로인데, 운동장에는 인조잔디와 트랙이 깔려있다. 모래가 잔뜩 날리던 운동장은 내 기억에만 살아있다.건물은 어릴 때 그대로인데, 운동장에는 인조잔디와 트랙이 깔려있다. 모래가 잔뜩 날리던 운동장은 내 기억에만 살아있다.
건물은 어릴 때 그대로인데, 운동장에는 인조잔디와 트랙이 깔려있다. 모래가 잔뜩 날리던 운동장은 내 기억에만 살아있다.
2학년부터는 엄마 없이 혼자 학교 생활을 해보기로 했다. 그래도 나름 1년 짬이 있어어인지 그럭저럭 2학년 1학기 때의 기억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점점 더 많아지고 작아지는 텍스트들을 따라가기에 내 눈은 너무 벅찼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가게에 손님으로 온 어떤 분이 코를 파묻고 책을 읽는 나를 보시고는 서울맹학교의 존재를 알려주셨고 국민학교 2학년 2학기부터 청와대가 있는 그 동네로 매일 버스 통학을 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매일 매일 버스를 타는 게 좋았다. 앉을 자리가 없을 때는 기사님 옆에 툭 튀어나온 엔진 위에 앉아서 가기도 했다. 136번 버스는 나의 든든한 통학 버스가 되어주었다.
내가 자라는 동안 내 고향도 자랐다. 어쩌다 하귯길 버스에서 깜빡 졸아 내릴 곳을 지나치면 공포의 시골 풍경이 펼쳐지던 말죽거리는 점점 큰 길이 생기더니 곧 아파트가 쑥쑥 심겨졌다. 우리 집에서 한 블록만 나가면 넓다랗게 펼쳐지던 강남대로 양쪽으로 바글바글 집들이 생겨났고 오가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렇게 자라나는 강남 덕에 메이커는 아니지만 깨끗한 옷을 입을 수 있었고, 된장찌개를 먹을 수 있었으며, 큰 불편 없이 잠들 수 있었음을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유동인구가 많아질 수록 아빠랑 엄마는 더 바쁘게 가게에서 일하셔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버셔서 나를 키우셨으니까. 밤 늦게 일하시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혼자 있는 방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활기찬 소음은 왠지 나를 더 외롭게 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고향 강남은 언제나 바쁘게 오가는 사람과 자동차로 가득한 강남대로, 그리고 그 한 켠에 묻어 있는 뜻모를 외로움으로 박제되어 있다.

지하철이 생겼으면

입구 지붕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 눈이 오면 정말 계단은 공포 그 자체였다.입구 지붕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 눈이 오면 정말 계단은 공포 그 자체였다.
입구 지붕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 눈이 오면 정말 계단은 공포 그 자체였다.
아주 어릴 때 친척 집에 놀러가면 언제나 기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기차가 좋았다. 심장을 울리며 지나가는 기관차 소리를 들으면 나도 함께 어디론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지하철도 엄연히 기차이니까, 그래서 나는 우리집 근처에 지하철 역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집 앞 강남대로변을 굴삭기가 열심히 파기 시작했다. 우와! 드디어 우리 동네에 지하철이 생기나보다! 그러나 나의 꿈은 산산히 부서졌다. 그저 강남대로를 가로지르는 지하보도 하나가 생겼을 뿐이었다. 뭐, 그래도 지하보도가 생기고 나서 며칠 동안은 그곳을 돌아다니며 마치 지하철역인 양 뛰어놀던 기억은 있다.
1987년, 내 국민학교 시절이 저물어가던 그때, 지하철 3호선과 4호선이 개통되었다. 우리 동네는 아니지만 집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걸어가면 신사역이었고, 거기서 ‘중앙청' 역까지 가는 3호선을 탄 다음 또다시 15분쯤 더 걸으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미친 듯이 지하철이 타고싶던 그때 나는 부모님에게 정기권을 끊어달라고 때를 썼다. 시간도 돈도 더 많이 드는 지하철 등굣길을 완강히 반대하시던 아버지께 싸가지 없는 나는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냐며 아픈 말을 벹었고, 망연자실한 아빠 대신 결국 엄마가 정기권을 끊어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돌이키고 싶은 흑역사이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고3 때보다 더 아프게 다가오는 기억이었다.
그래도 철 없는 어린 나는 신사역까지 걸어서 3호선을 탔고, 얼마 있다가 ‘경복궁' 역으로 이름이 바뀐 ‘중앙청' 역에서 내려서 학교까지 걸어갔다. 몸이 고단했지만 지하철을 탈 수 있는 게 좋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힘들어서 지하철을 그만 타고 싶었던 때에도, 내가 던진 비수 때문에 마음 아파하셨을 아빠를 생각하면, 차마 그만둘 용기가 나지 않았을 지도.
중학교 때는 ‘약시 학급'이 있는 여의도 중학교로 전학을 갔기 때문에 내 사람 지하철과는 이별할 수 밖에 없었다. 지겨웠던 68번 버스 속에서 방향이 같은 친구놈이랑 나눴던 시덥잖은 이야기들, 하차벨을 먼저 누르겠다고 쟁탈전을 벌이다가 손이 빠른 그놈에게 져서 열받았던 일… 그리고 다시 돌아온 서울맹학교를 통해 지하철 3호선과 재회할 동안 내가 커 가듯이 내 고향 강남도 부쩍 커졌다.

지하철 다섯 개가 지나가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7호선 논현역이 생기던 날은 어릴 때처럼 그렇게 가슴 뒤고 설레지는 않았다. 그저 어릴 때 논현 지하보도가 생길 때처럼 한 두번 7호선을 타보고는 시큰둥해졌다. 더구나 첫번째 교편을 잡았던 내 모교와 7호선은 전혀 닿아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한동안 83-1번을 타고 광화문을 가서 학교까지 걸어가는 루트를 이용했다. 어릴 때만큼 지하철에 미쳐(?)있지 않았던 탓이겠지. 그래도, 남산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버스는 나름 운치 있었다. 앉아서 갈 수만 있다면.
얄궂은 운명으로 7호선 중계역 근처로 출퇴근하기 시작했던 2005년부터 나는 슬슬 고향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더 이상 힘들게 가게를 꾸리시는 게 싫어서, 사실은 아빠도 없는 새벽 장사에 강남대로를 쏘다니던 술취한 젊은 것들의 비위를 맞추시는 어머니가 보기 싫어서 이제 가게 그만 하시라고 권했다. 30년 이상 강남에 살았던 나보다 더 오래 강남을 지키셨던 어머니의 심리적인 충격을 덜어드리려고 나는 7호션 논현역과 닿아 있는 중곡동으로 이사했다.
한동안 어머니는 친구를 만나러, 성당을 다니러, 아니면 그냥 마실 삼아 7호선을 타고 논현역을 다니셨다. 좀도둑이 들어서 온 방을 해짚어 놓은 2007년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지금 이곳에 이사오게 되었다. 그래도 고향인 강남과 닿고 싶었는지 어머니와 나는 논현과 닿는 7호선과 내 직장으로 가는 4호선이 교차하는 지금 여기에 집을 구했다. 그리고 어느새 10년이 훨씬 넘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이제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데, 가끔 고향에 사는 친구놈을 만나러 갈 때마다 마주하는 강남은 여전히 쑥쑥 자라고 있다. 집 앞에 교보문고가 생기면 매일 들러 책을 읽겠다던 헛된 맹세를 지킬 새도 없이 떠나온 고향에 떡하니 교보빌딩과 교보둔고가 생겼으며, 황금빛으로 번쩍이는—사실은 약간 황토색을 띠는— 9호선이 들어왔다. 그리고 May 28, 2022에 신분당선이 강남역, 신논현역, 논현역, 신사역을 관통해버렸다.
떠나온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내 고향, 어릴 때는 배밭과 들판 뿐인 논현동, 툭하면 홍수가 터져서 내 어릴적 추억을 모조리 쓸어갔던, 번잡함과 공허함이 함께 묻어있는 내 고향은 이제 2, 3, 7, 9호선과 신분당선, 도합 다섯 개의 노선이 씨줄과 날줄로 얽힌 지하철 천국(?)이 되어버렸다.
상을 받았다는 강남 교보빌딩상을 받았다는 강남 교보빌딩
상을 받았다는 강남 교보빌딩
내가 만일 40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그래서 똘망똘망한 눈과 지하철에 미쳐 뛰는 심장을 가진 초등학생이었다면 우리집 주변을 달리고 있는 다섯 개의 노선을 보며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으려나? 문득 어느 트위터 친구분이 올리신 지하철 노선도를 보다가 그렇게 40년 전의 기억이 떠올라 고향을 그려본다.
지금 내 가슴을 미쳐 날뛰게 하는 건 무엇일까?
나에게 그런 게 지금도 있기는 할까?